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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웹진 [DESIGN] 우리는 실패할 것이고 또 실패할 것이다
2022.04.28 / 김형진 / 워크룸 디자이너

[DESIGN]

2022년 PLATFORM P 웹진에서는 ‘워크룸’의 김형진 디자이너가 책의 만듦새와 그를 고려한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1편은 <우리는 실패할 것이고 또 실패할 것이다>입니다. 

 

 

인쇄는 그저 그렇고 제본도 마음 같이 진행되지 않아 심란했던 저녁, 파주에서 돌아오는 2200번 버스 안에서 사진평론가 김현호의 글을 읽었다. 「당신들은 좋겠다, 피와 살이 없어서」라는 제목이었다. 눈은 글줄을 따라 움직였지만, 머리 한편은 후회 섞인 잡념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무슨 내용인지 이해할 마음도 없이 그냥 읽어 내려가다 다음 문단에서 멈춰 서 밑줄을 그었다. 

 

피와 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거추장스러운가. 심지어 그리스도조차도 고작 먹을 것으로 유혹을 받는다. 육체를 지닌 그의 고난은 발로 차이고 채찍질 당하며 언덕을 오른 후 형틀에 못 박혀 피와 물을 흘리며 속절없이 죽는 것에 불과하다. 전혀 형이상학적이지도 거창하지도 않다. 몸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시련과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윤리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 문단을 두세번 반복해 읽으면서 생각했다. 종이를 바꿨어야 했을까. 비싸더라도 실 제본을 할 걸 그랬나. 박 감리를 해 본 적은 없지만 이번에는 가봐야 했을까. 그리고 생각했다. 한장 한장의 종이에 4가지 종류의 잉크를 나눠 묻히고, 말리고, 접고 실 혹은 풀로 묶는 과정은 얼마나 거추장스러운가. 잉크는 종이에 스며들며 그 선명함을 잃는다. 종이는 접히면서 조금씩 뒤틀리고 한 번에 두 배씩 몸을 불린다. 박의 외곽선은 천이 짜인 결을 따라 번지고 뜯겨 나간다. 몸을 지녔다는 건 왜 이토록 구차하고 번잡스러운가. 

 

1. 

그래픽이 깔끔하고 투명하게 정리된 세계라면 제작은 지저분하고 불투명한 세계다. (디자이너 입장에서) 그래픽은 계산의 결과물이지만 제작은 짐작의 혼합물이다. 피와 살을 얻은 그래픽은 쾌락의 도구인 몸을 얻었지만 그것은 결점투성이이며 태어남과 동시에 늙어갈 것이다. 편집 프로그램을 구동하는 디자이너로서 나는 화면 안에서 전능의 권한을 부여받지만 제작의 영토 안에선 고작 요구 많은 청원인으로 추락한다. ‘마젠타를 조금 더 올려주실 수 있을까요’, ‘롤러를 한 번만 더 닦아보면 어떨까요’, ‘종이 사이에 간지를 끼워 재단하면 묻음이 덜할까요’, ‘한 번만 더 돌려주세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요.’

 

2.

제작의 영토로 발을 들이기 직전까지 우리는, 그리고 데이터는 완벽하다. 더군다나 우리가 만든 데이터는 최종 결과물과 1:1 크기로 상응하므로 해석의 가능성은 차단된다. 해석된 결과물은 오류이며 종종 폐기되고 재제작된다. 인쇄 제작의 가장 독특한 면모는 여기에 있다. 당신이 도자기를 굽는다고, 혹은 건축물을 설계한다고 생각해보자. 공예가나 건축가도 스케치와 설계의 과정을 거쳐 자신만의 청사진을 가지고 제작을 시작할 테지만 인쇄물 디자이너처럼 완벽하게 1:1로 대응하는 파일을 들고서 최종 단계에 다다르지 않는다. 공예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우발적 결정들이 우리에겐 없다. 스케일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건축적 현기증 또한 우리에겐 낯선 것이다. 우리가 만든 파일들은 이를테면 도달해야 하는 이데아로 역할 한다. 때문에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3.

내가 키우는 개는 ‘개’라는 이데아의 불완전한 복제일 수밖에 없듯 내가 만든 책들 또한 내가 만든 파일의 불완전한 재현물이다. 오프셋 인쇄의 파랑은 파랗지 않고 글자들의 외곽선들은 종종 결을 따라 번져 울퉁불퉁해진다. 나쁜 선택은 상황을 악화시키지만 좋은 선택이라고 해서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는다. 이데아란 허상이고 개별자만 있다고 우겨봤자다. 남도 아니고 내가 만든 파일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올라앉아 우리를 딱하게 내려다보고 있을 테니까.

 

4.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이를 피할 방도란 없다. 너저분한 결과물을 책상 아래로 숨겨 놓고 티끌 없이 말끔한 디지털 목업 이미지를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다고 우리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없앨 수는 없다. 이 실패를 학습하면 다음 실패가 기다린다. 이 실패의 연쇄는 결코 끝나지 않으며 지치지도 않는다. 내가 만든 피와 살은 오늘도 실패했고, 내일 또 실패할 것이다. 피는 온전히 새빨갛지 않고 살은 매일매일 땅을 향해 쳐질 것이다. 이게 내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다.

 

 

김형진│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2005년부터 1년간 안그라픽스에서 디자이너로 일한 뒤 2006년부터 현재까지 워크룸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