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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아카이브 [DESIGN] 종이(2)
2022-06-28 / 김형진 / 워크룸 디자이너

[DESIGN]

2022년 PLATFORM P 웹진에서는 ‘워크룸’의 김형진 디자이너가 책의 만듦새와 그를 고려한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3편은 지난달에 이은 <종이(2)>입니다. 

 

 

1.

2주 전 사무실 이사를 했다.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이사란 종이 버리기로 시작해 종이를 상자에 넣어 옮기고 그것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대략 가로 40센티, 높이 30센티쯤 되는 종이 상자에 종이책들을 차곡차곡 쌓아 넣는다. 그중 일부는 버리고 남은 일부는 장소를 옮겨 새로운 책장에 꽂아 넣는다. 마지막으로 비워진 종이 상자를 해체해 재활용 쓰레기로 정리한다. 이 과정을 100번쯤 반복하다 슬기와 민이 (자신들의 스튜디오 이사 직후) 트위터에 썼던 말이 기억났다. “책이 친구를 만드는지 적을 만드는지 알 수 없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책은 쓰레기를 만든다.”

책이 쓰레기라는 단언은 다소 과격하지만 진실이기도 하다.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무거운 쓰레기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속담이 있지만 말 그대로 한 장일 때 얘기다. 사무실로 배달되어 오는 A4 용지 한 상자만 해도 무겁기가 돌덩어리보다 더하고 매엽 인쇄용지 500장을 담은 한 연(連, ream)은 맞든다고 해서 쉽게 들 수 있는 무게를 넘어선다. 코팅이라도 되어 있으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패션 잡지 100권이면 사람도 깔아뭉개 죽일 수 있지 않을까?

 

2.

유튜브 과학 채널 같은 곳에서 자주 등장하는 질문이 있다. 종이는 몇 번 접을 수 있을까. 산술적으로야 한없이 접을 수 있겠지만 실재하는 종이는 7번 혹은 8번 이상 접을 수 없다는 게 정설이다. 아무리 크고 얇은 종이라고 해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고 한다). 물리적 불가능성은 접어두고 마구 접어본다면 어떻게 될까. 27번 접으면 에베레스트산보다 높아지고, 42번 접으면 지구에서 달까지 거리보다 두꺼워지며, 103번 접으면 우주보다 커진다.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다.

한번 접을 때마다 2배씩 두꺼워지고 크기는 1/2로 줄어드는 단순한 법칙은 인쇄 제작 현장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가 더해진다. 재단 이후 접힌 종이의 바깥에 위치한 면은 가운데 면보다 딱 종이 두께만큼 더 짧아진다는 사실이다. 종이가 두꺼울수록, 접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그 차이는 커진다. 그 결과 책의 좌우 여백이 달라지고, 심한 경우 글 영역이 책의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이 현상을 최소화할 방법은 비교적 간단하다. 접지 횟수를 줄여 달라 요청하는 것이다. (4번 접는) 32페이지 접지보다는 (3번 접는) 16페이지 접지, 혹은 (2번 접는) 8페이지 접지가 유리하다. 물론 접는 수가 적을수록 제작 시간과 비용은 늘어난다. 예산의 제약이 있다면 무작정 8페이지 접지를 고집하긴 어려운 일이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정밀한 계산을 통해 매 페이지 판면의 요소를 좌우로 움직여 오차를 최소화해 볼 수도 있다. 언제 그 짓을 하냐며 고개를 내저을 수도 있지만 인쇄 결과물을 받아보고 후회하느니 지금 고생하는 게 낫다.

 

3.

종이가 우리에게 강제하는 물리적 조건은 하나가 더 있다. 바로 '결'이다. 세로이거나 가로이거나. 이를 종목 혹은 횡목이라 부르기도 한다. 모든 인쇄용지엔 결이 있고, 우리가 결정한 판형에 따라 어떤 결의 종이를 사용해야 하는지가 결정된다. 결을 무시할 경우 종이는 터지거나 파도치듯 휘어지기도 하고, 책 넘김이 안 좋아지기도 한다. 

문제는 모든 종이가 가로, 세로결을 다 갖추고 있진 않다는 데 있다. 내가 고른 종이와 판형이 서로 어긋나는 경우 우리에겐 세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종이의 손실을 무릅쓰고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첫 번째 선택지. 결이 맞는 다른 용지로 교체하는 것이 두 번째 선택지. 제작 사고의 위험을 감수하고 결을 무시하는 것이 마지막 세 번째 선택지다. 이중 정답은 없다. 처한 상황에 따라 매번 그에 따른 결정을 하는 것이 옳다. 제작 예산이 여유롭거나 선택한 종이가 대체 불가능할 경우라면 첫 번째 선택지를 택할 수 있다. 보다 많은 경우 우리는 결이 맞는 다른 종이로 교체하는 두 번째 옵션을 선택한다. 세 번째 선택엔 용기가 필요하다. 사고에 따른 재제작의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접히는 부위에 일일이 누름 자국(소위 '오시')을 내 위험성을 줄이기도 한다. 100g 이하의 얇은 종이를 사용한 경우에도 '엇결'에 따른 사고 위험이 상대적으로 적어진다. 사람은 마를수록 고집이 세다는데 종이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김형진│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2005년부터 1년간 안그라픽스에서 디자이너로 일한 뒤 2006년부터 현재까지 워크룸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