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
2022년 PLATFORM P 웹진에서는 ‘워크룸’의 김형진 디자이너가 책의 만듦새와 그를 고려한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6편은 <인쇄(3) >입니다.
아주 드물게 제본이나 후가공을 직접 확인해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지만 디자이너의 일은 대개 인쇄 감리로 마무리된다. 인쇄 파일(보통은 고해상 PDF)을 제작해 인쇄소에 넘기고, 확인용 PDF를 다시 받아 혹시나 있을 실수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나면 본격적인 인쇄 준비가 시작된다. 출력소에서는 터잡기(일명 '하리꼬미')와 인쇄판 출력을 하고, 재단소에서는 제지회사가 보내준 종이를 제작 사양에 적합한 크기로 잘라낸다. 인쇄소에서는 인쇄 데이터의 색값을 확인하고, 종이 두께에 따라 미리 인압(인쇄압력)을 조절한다. 모두 디자이너가 인쇄소에 도착하기 전 벌어지는 일들이다.
인쇄 감리란 생각보다 까다로운 일이다. 종이에 찍힌 인쇄물이란 절대 중성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눕혀 놓고 볼 때와 종이를 세워 들고 볼 때가 달라 보이고, 하얀 형광등 아래에서 볼 때와 햇볕 아래에서 볼 때가 또 다르다. (햇볕 아래에서 봐야 제대로 된 감리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독자의 독서 환경을 고려한다면 실내의 인공조명이 더 정확한 조건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전지 크기의 인쇄에서는 왼쪽 면과 오른쪽 면의 농도가 확연히 차이 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고, 갓 찍혀 나와 잉크가 촉촉한 상태와 건조가 마무리된 이후가 확연히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말하자면 인쇄 감리란 이 모든 변수에 어림짐작하며 대처하는 과정이고, 그 대처의 기준이란 디자이너 본인과 인쇄 기장의 경험과 감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경험이란, 또 감각이란 얼마나 믿을 만한 것일까.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인간의 경험이나 감각에 기댄다는 건 그냥 운에 맡긴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잘 훈련된 디자이너라면, 경험이 풍부한 기장이라면 조금 낫겠지만 그래봤자 인간의 눈일 뿐이다. 눈만큼 속이기 쉬운 감각 기관도 없기 때문이다. 색채 회사에서 발행하는 원색 배합표나 팬톤 색상 책자 등이 존재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는 최신 기술을 탑재한 색상 측정계를 사용해 cmyk 값을 수치로 측정해 원본과 비교하기도 한다.
'조금 노란 것 같은데, 청을 높여주세요', '전체적으로 멍해 보여요. 4원색을 올리면서 먹을 특히 조금 더 내려찍어주세요', '종이가 얇긴 하지만 인압을 올려주실 수 있을까요', 'rpm을 낮춰서 천천히 찍어주세요'. 암구호처럼 들리는 이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디자이너와 기장은 기 싸움을 벌인다. 겉으로 아무리 평화로워 보여도 애초에 원하는 바가 다른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은 어쩔 수 없다. 디자이너는 시간이야 얼마가 걸리든 원하는 톤을 얻어야 하고, 기장은 가능한 빠른 시간 내에 인쇄를 마치고 다음 인쇄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타500 한 박스를 준비해가든, 시답잖은 농담으로 기장과 친분을 쌓든 이 전제는 변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자면 인쇄 감리란 어쩌면 그저 ‘너무 편하게 마음대로 찍진 말아 주세요’라는 부탁의 다른 형식일지도 모른다.
김형진│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2005년부터 1년간 안그라픽스에서 디자이너로 일한 뒤 2006년부터 현재까지 워크룸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