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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아카이브 [BOOKS] 특별한 여행
2022-05-04 / 서지애 / 노말에이 대표

[BOOKS]

2022년 PLATFORM P 웹진에서는 독립서점 ‘노말에이’의 서지애 대표가 소규모 출판사들의 작지만 알찬 책들을 소개합니다. 2편은 <특별한 여행>입니다. 

 

 

『청춘의 문장들』을 읽고부터는 매년 봄이 오면 남쪽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서울의 벚꽃 개화 소식을 듣기 전, 직접 내 눈으로 봄나라를 목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나 둘 꽃소식이 들려오는 것은 바로 마음이 푹 꺼져들어간 그날부터다. 내 마음은 도로표지판처럼 하얀 화살표를 만들어 남해안을 가리키게 된다. 봄, 전방 338킬로미터. 교양국어 강의 시간처럼 해마다 봄이면 신문마다 실리는, 작년의 내용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남쪽 지방 꽃소식을 보다가 결국 참을 수 없게 되면 나는 짐을 챙겨들고 떠나게 된다. 통영, 섬진강, 해남 등 지도에 실린 그 이름들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 무렵이면 그곳의 이름은 같아진다. 봄나라.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마음산책, 2004, 33p. 

 

중간고사여서, 직장을 다녀서, 일이 많아서, 코로나19 때문에. 여러 이유로 이 버킷리스트는 실행 전이다. 내년에는 봄나라로 떠날 수 있을까? 그런데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여행을 미치도록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아직 떠나지 못한 것 같다. 새로운 환경에 놓이면 긴장을 하기 때문에 여행 중반쯤 익숙한 집에 가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든다. 한마디로 여행을 흠뻑 즐기지 못한다. 그런데도 여행을 꿈꾸고 또 여행 가방을 꾸린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문학동네, 2019, 51p.

 

여행의 매력은 무엇이 달라졌는지 당장 깨닫는 게 아니라 시간이 흘렀을 때 살며시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또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이번 달에는 특별한 여행기를 소개하려고 한다. 대형서점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여행 에세이란 여행 정보나 사진이 풍부한 책일 것이다. 그러나 노말에이와 같이 독립출판물을 취급하는 서점에서 여행 에세이란 좋아하는 것을 열렬히 말하는 책에 가깝다. 이번에 소개하는 책들은 여행기이면서 여행기가 아니다. 이 특별한 여행기를 읽으면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마음속 작은 무언가 달라져 있을 것이다. 독립출판*의 매력은 이런 책에서 나온다.

*독립출판을 정의하는 여러 표현이 있지만 Self-publishing이 가장 적당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직접 출판하는 일. 출판의 모든 분야(기획, 편집, 디자인, 인쇄, 유통)에 관여하여 한 권의 책을 완성하는 것이 독립출판이다. 

 

 

『내 친구의 집은 울릉도 북면』은 울릉도 북면에 사는 친구 집으로 여름휴가를 떠난 이야기다. 서울에 살다가 울릉으로 이주한 청년이 어떤 모양으로 살고 있는지, 그 친구를 바라보는 서울내기의 심경은 어떠했는지에 대해 말한다. 김경민 저자는 애초에 책을 쓸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여행기가 아닌 잡문집에 가깝다고 강조한다. 『여행의 이유』에서 여행기의 본질은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한 점에서 『내 친구의 집은 울릉도 북면』은 여행기의 본질에 가깝다. 그는 그저 쉬러 떠났다가 울릉도 여름휴가를 통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진지하게 하고 싶은 말이 생긴 것이다.

 

수도권에만 몰려 사는 걸 문제라고 혀를 차는 사람, 서울이 아니고서는 살기가 힘든 건 정말 잘못된 일이라 푸념하는 사람만이 흔한 가운데, ‘내가 살고 싶은 곳에서 사는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일에 뛰어드는 친구가 있어 자랑스럽다. / 135p

 

 

『The Way to Crema』는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고 영화 촬영지인 이탈리아 북쪽의 작은 마을 크레마를 다녀온 짧은 기록이다. 저자는 어떤 장소에 이유 없이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든 건 평생 처음이고, 여정의 효율성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가고 싶은 곳을 골라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나도 이 영화를 아주 좋아하고 한동안 깊게 빠져 있었다. 어렴풋이 알기도 어려운 이탈리아의 여름 속 반짝이는 햇빛을 보면서 아름답다는 감상을 가진 게 전부였다. 좀 더 나아가서 OST를 열심히 들은 것 정도. 그런데 저자 류미는 크레마로 떠났다. 서점을 하면서 많은 덕후(어떤 분야에 몰두해 전문가 이상의 열정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를 만나다 보니 무언가 좋아한다는 마음을 표현하는데 종종 멈칫하게 된다. 크레마는 가봐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지 하고 말이다. 저자의 짧은 여행기는 무슨 일을 하기 전 머뭇거리는 내게 용기를 심어주었다. 

 

영화를 보고 마음 한구석에 남았던 그 노랗고 초록한 햇빛이 나에게 떠날 용기의 불씨가 된 것 처럼, 크레마에서 내 눈으로 목격하고 내 귀로 듣고 내 피부로 느낀 기억이 언젠가 또 지쳤다고 느꼈을 때, 떠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를. 그리고 그 반영의 호숫가에 가만히 서서 그 순간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만하다고 느낄 수 있기를. / 57p

 

 

영화를 좋아하는 또 다른 열정가가 있다. 『저 그냥 영화 좋아하는 사람인데요』의 이보미 저자는 2015년부터 지금까지 총 22곳의 영화 촬영지를 다니며 영화 스틸컷(드라마나 영화 등 필름 가운데 한 컷만 골라내어 현상한 사진)과 실제 배경을 겹쳐 사진을 찍는다. 그 중 5곳의 기록을 이 책에 실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독립영화 촬영지가 대부분이다. 상업영화는 기술로 가상의 세계를 만들거나 해외, 전국 로케이션 촬영이 많기 때문이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 등장하는 초원 사진관은 군산의 랜드마크가 됐다. 이런 관광지가 아니라면 감독의 인터뷰를 읽고 검색하여 촬영 장소를 발견하거나 탐정처럼 영화를 여러 번 반복해 보며 번지 주소를 단서 삼아 작은 골목을 찾아낸다. 이렇게 수많은 노력을 들여도 끝내 찾지 못하면 영화 관계자에게 연락해 물어보기도 한다. 누가 봐도 ‘어떻게 이 장소를 찾아냈지?’하는 탓에 로케이션이나 촬영 관련 일을 한다고 오해를 받기도 한다. 책에 실린 내용 뿐 아니라 이보미 저자의 인스타그램 계정(@lbbbbbom)에서 다른 영화 촬영지도 살펴 볼 수 있는데, 영화를 보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하고 싶다. 

 

실제로 해당 촬영지에 도착하면 ‘이 영화를 여기서 찍었구나’ 하는 현실의 감정이 아니라, 영화 속 인물이 ‘이곳에 살았고, 이곳을 걸었고, 이곳에 앉아있었는데’하며 실재하는 사람처럼 아른거린다. / 3p

 

 

이런 책이 또 있다. 『읽을지도, 그러다 떠날지도』는 독서 모임에서 만난 4명의 저자가 한국 소설 속 등장하는 공간으로 여행을 떠난 기록이다. 소설을 읽을 때마다 “여기에 나오는 장소는 어디지?”라는 생각을 했고 단순한 이 질문에서 그들의 여행이 시작됐다. 이들은 지도를 더듬으며 『김약국의 딸들』의 통영, 『운수 좋은 날』의 경성(서울), 『소년이 온다』의 광주, 『차남들의 세계사』의 원주,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인천과 삼천포, 『한국이 싫어서』의 서울 아현동으로 직접 떠났다. 서문을 읽으며 솔직히 ‘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장소가 궁금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내 공간적 배경이 소설의 상황과 주인공의 심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았다. 

 

김약국의 딸들의 등장인물이 무려 삼대에 걸쳐서 살아온 공간이지만, 느긋하게 걸어도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작은 동네인 셈이다. 직선거리가 아니라 그 모든 거리를 걷는다고 생각하고 넉넉잡아 계산해도 5km면 충분하다. (생략) 이 책을 읽다 보면 주인공들의 삶이 왜 이렇게까지 비극적이냐는 의문이 든다. 주변 눈치 안 보고,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서 주체적으로 실행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런데 이 5km의 거리를 보고 있으면 이 모든 비극의 이유가 어느 정도 설명된다. 평생을 같은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고 사니 눈치를 안 볼 수가 없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실행하기에는 그들의 경험과 사고 범위가 좁았던 것이다. 결국 모두가 비극적일 만큼 좁은 삶의 반경으로 인한 피해자다. / 34p

 

2차원의 텍스트가 3차원으로 확장되는 경험은 새로운 감각을 여는 일이다. 실재하는 공간을 경험함으로써 소설 속 인물의 삶을 적극 이해할 수 있다. 직접 가보지 않았다면, 지도를 펼쳐보지 않았다면 『김약국의 딸들』 속 등장인물의 삶에 의문점만 가득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외국소설 속 장소도 지도에 표시해 두었다고 한다. 다음 여행기도 궁금해진다.

 

 

나도 특별한 여행기를 기획했다. 2017년, 2018년에 『수비니어 북』, 『수비니어 북2』을 발행했다. 여행지에서 작은 기념품을 하나씩은 사지 않나? 그 물건에 담겨 있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었다. 『수비니어 북』은 챕터를 2개로 나눠 내가 산 기념품과 친구들이 여행을 다녀와 선물로 준 기념품에 대해 쓴 책이다. 『수비니어 북2』은 영역을 넓혀서 평소 궁금했던 사람들에게 어떤 기념품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지 글을 써 달라고 요청했다. 물건 20개에 담긴 이들의 여행기를 읽으며 절대 이 순간이 어땠는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타인의 즐겁고 행복한 경험이 개개인의 마음에 품어 둔 아름다운 순간을 떠올리는 계기가 되리라 의심치 않으며 책을 만들었다. 

 

서점을 하면서 좋아하는 걸 깊이 생각하고 탐구하는 이들을 가까이서 볼 기회가 많다. 다른 생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건 큰 행운이다. 여행을 통해 성장하는 것처럼 이 특별한 여행기들이 내 삶의 관점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인생의 전환점은 극적이고 거대하기보다는 사소한 순간에서 오기 마련이다.

 

 

서지애│노말에이 대표이자 디자인스튜디오 일삼일와트의 디자이너. 혼자 조용히 책 읽는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