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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아카이브 [DESIGN] 종이(1)
2022-05-25 / 김형진 / 워크룸 디자이너

[DESIGN]

2022년 PLATFORM P 웹진에서는 ‘워크룸’의 김형진 디자이너가 책의 만듦새와 그를 고려한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2편은 <종이(1)>입니다. 

 

 

1. 

종이는 독특한 사물이다. 내면이 없기 때문이다. “육체는 정신의 이미지” 따위의 중세 수도사가 지껄일 것만 같은 수사와 종이는 아무 상관이 없다. 종이의 등과 배는 하나이고, 얼굴과 뒤통수는 서로 맞붙어 있다. 종이의 이쪽과 저쪽면 사이 어디에도 내면이 기거할 공간은 없고, 따라서 그것이 만들어내는 온갖 거추장스러움-거짓말, 배신, 음흉함, 외로움, 슬픔, 기쁨, 괴로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종이는 그야말로 얄팍하고 단순하며, 정직한 물건이다.

 

2. 

그런데도 사람들은 종이에 이런저런 인간적 수사를 덧붙이는 걸 좋아한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따뜻하다느니, 사람의 피부를 닮았다느니, 마치 숨을 쉬는 것 같다느니. 조금 더 근사하게 말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물성'이라는 의심스러운 단어를 끌어들이기도 한다. 그러면서 종이 표면의 촉감, 그것을 한 장씩 넘기는 경험이야말로 종이만이 줄 수 있는 독특한 무엇이라고 신비화한다. 하지만 대개의 인본주의적 은유가 그렇듯, 이 또한 해당 대상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거짓 혹은 과장에 가깝다. 종이는 따뜻하지도, 피부와 닮은 것도, 숨을 쉬지도 않는다. 종이의 촉감이 유별날 이유도, 종이 한 장을 넘기는 경험이 모니터 스크롤보다 특별할 이유도 없다. 

 

3. 

정직이란 왜곡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종이에 검정 잉크를 찍으면 검정으로, 노랑 잉크를 찍으면 노랑으로 보인다. 검정을 파랗게 보여주거나 노랑을 빨갛게 보여주는 일은 없다. 하지만 종이의 종류와 그에 따른 성질에 따라 아주 까맣게 혹은 덜 까맣게 보여주는 일은 늘상 생긴다. 이게 종이의 정직함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좌절감의 첫 단계다.

이를테면 표면이 코팅된 아트지에 찍힌 검정은 모조지의 그것보다 훨씬 까맣다. 잉크가 건조되는 시간 동안 펄프의 섬유질로 스며들지 않고 코팅된 표면 위에 그대로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아트지와 함께 대표적 코팅지 계열로 분류되는 스노우지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보자면 아트지로 대표되는 코팅지야말로 가장 솔직한, 말하자면 거울 같은 종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나치게 투명하고 정직한 것을 "노골적"이라 말하며 불편해하기도 한다. 실제로 아트지에 대한 선호는 재현의 능력치에 비해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다. 낮은 인쇄 적성에도 불구하고 모조지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지나치게 선명한 것을 마주하기 두려워하는 심리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이게 종이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두 번째 좌절감이다. 

이렇게 보자면 흔히 러프 그로스(rough-gloss)지라 불리는, 종이치고는 예외적으로 의뭉스러운 계열에 대한 선호가 높은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인쇄되지 않은 면은 모조지처럼 담백해 보이지만 잉크가 올라탄 면은 코팅지처럼 반짝이는 러프 그로스지는 아트지처럼 싸구려로 보이지도 않고, 모조지처럼 탁한 인쇄 결과물을 내보이지도 않는다. 언뜻 생각하면 완벽한 종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진짜 모조지 같지도 않고 아트지 같지도 않은, 정체성이라고는 없이 어중간한 종이라고 말이다. 포토샵 필터를 먹인 것 같은 둔탁한 느낌의 종이, 활짝 웃거나 찡그리는 일 없이 항상 모호한 표정만 짓는 인사과 직원 같은 종이가 러프 그로스지다.

 

4. 

종이가 주는 좌절감은 경험이 쌓인다고 줄어들지 않고, 매번 새로운 각도에서 마치 처음인 것처럼 찾아오지만 그렇다고 인쇄를 포기할 순 없는 일이다. 그래서 디자이너들은 온갖 방편을 동원한다. 100g 보다 가벼운 아트지를 써서 노골적인 느낌을 줄이거나, 모조지를 쓸 때는 일반 유광 먹이 아닌 슈퍼 먹, 혹은 무광 먹을 사용해 선명도를 조금이라도 높여보려 애쓴다. 아니면 반대로 아예 더 질 낮은 중질지를 사용해 그래픽적 효과를 높이기도 한다. 러프 그로스지 특유의 비겁한 느낌이 싫다면 경량 코트나 미량 코트지를 찾아 사용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바니시를 얹어 채도를 살짝 높여주거나 형광 별색을 사용해 시선을 분산시키기도 한다. 

말하자면 디자이너들은 온갖 짓을 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종이가 제공하는 좌절감을 중화시키기 위한 이 모든 노력을 가리켜 사람들은 종이 인쇄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라 말한다. 하지만 나는 '특별함'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나름대로 볼만한 구석이라 말하고 싶다. 

 

 

김형진│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2005년부터 1년간 안그라픽스에서 디자이너로 일한 뒤 2006년부터 현재까지 워크룸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