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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아카이브 [SPECIAL] 책에 미친 사람들의 축제: 서울국제도서전 답사기
2022-06-15 / 박초롱 / 딴짓 출판사 대표

[SPECIAL]

2022년 PLATFORM P 웹진은 출판계의 크고 작은 흐름들을 들여다보는 특집을 매달 선보입니다. 6월 특집글은 박초롱 대표의 <책에 미친 사람들의 축제: 서울국제도서전 답사기>입니다.

 

 

“나 그날 안 되는데. 책 팔러 가야 하는데.”
“무슨 책을 팔러 가?”
“국제도서전에 나가야 해.”
“그까짓 거 얼마나 번다고!”

국제도서전에 나가느라 아빠 생일잔치에 못 간다고 말하자, 엄마는 굽은 내 등짝을 후려쳤다. 내 등이 하루가 다르게 굽어지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자세 때문이라기보다는 엄마의 등짝 스매싱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까짓 거 얼마나 번다고’라는 엄마의 말이 상당 부분, 아니 사실은 전적으로 사실인지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두 명의 동료와 함께 독립출판물을 만든 지 벌써 8년 차다. 우리가 만드는 딴짓매거진은 독립출판계의 시조새, 독립잡지의 전원일기라고 불리지만, 책 판매 실적은 별명에 상응하지 못한다. 우리는 능력은 없지만 파이팅은 넘치는 코미디의 주인공들처럼, 오랫동안 안 팔리는 책을 만들어 왔다. 8년 동안 15호의 매거진과 3종의 단행본을 만들었지만, 어느 것도 대박을 치지 못했다. 우리의 실적 없음은 출판 마켓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다양한 독립출판 마켓에 책을 바리바리 싸 들고 참여한 지 오래되었지만, 매출이 하루 20만 원을 넘은 적은 잘 없었다. 책 한 권에 마진이 약 3천 원. 운이 좋아 20권을 팔았다고 해도 수익은 6만 원. 셋이 그곳에 나가 하루 2만 원을 번다. 그마저도 마켓에 참여한 다른 셀러들의 책을 사느라고 탕진해버린다. 하여, 우리에게 도서전이란 동료들을 보러 가는 자리이자 우리가 아직도 책을 만들고 있음을 즐겁게 자조하는 자리였다. 돈을 버는 자리는 아녔다는 말이다.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이 2022년 국제도서전이었다. 국제도서전은 참여비가 상대적으로 값이 나가기에 이전에는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번에는 플랫폼 P에서 입주사에게 국제도서전에 참여할 기회를 마련해준다고 했다. 부스도 주고, 책상도 주고, 책 운송 서비스도 제공해주고, 책을 꾸밀 도구도, 심지어는 간식도 준다고 했다. 이즈음에서 플랫폼 P를 찬양하고 가자. 오,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 나의 죄, 나의 영혼! 플-랫-폼-P. 누군가에게 이런 우쭈쭈를 받아본 것이 얼마 만인지 몰랐다. 우리는 신이 나서 짐을 꾸렸다.

“몇 권 가져가지?”
“다 합쳐서 100권만 가져가자.”
“너무 적지 않을까?”
“어차피 팔리지도 않아.”

동료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출판계가 불황인 것이 어디 하루 이틀이냐. 출판계는 단군 이래로, 아니 파피루스의 발명 이래로 불황이었다고 했다. 우리는 보부상처럼 소박하게 봇짐을 꾸려 도서전에 나갔다. 

 

 

우리만의 축제인 줄 알았건만

도서전이 열리는 5일 중에 우리는 주말 2일만 함께 했다. 그런데도 입이 떡 벌어졌다. 이 많은 사람이 대체 어디서 온 거지? 하루 방문객이 2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높은 천장까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닿을 정도였다. 입장 대기줄이 (과장하자면) 에버랜드 줄만큼 길게 늘어섰다. 플랫폼 P 부스는 대부분 독립출판제작자로 구성된 작은 부스들과 붙어 있었는데, 이곳까지 사람이 밀려 들어와 왁자지껄했다. 자리에 앉을 새도 없이 우리는 계속 사람들에게 책을 홍보할 수 있었다. 입을 여는 만큼 책도 잘 팔려나갔다. 

“당신의 딴짓을 응원하는 잡지입니다.”
“여자들이여, 야망을 가져요.”

사실 돈을 번다는 기쁨보다는, 우리가 만든 책이 창고에 쌓이지 않고 주인을 찾아간다는 뿌듯함이 컸다. 함께 참여한 플랫폼 P 이웃들도 쏠쏠히 책을 파는 것처럼 보였다. 에디토리얼 출판사는 첫 날 가져왔던 김보영 작가의 『진화 신화』 사인본을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다 팔았고, 딸세포 출판사가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의 굿즈로 가져온 수건은 3시간 만에 동이 났다. 다리가 아프다고, 목이 칼칼하다고 말하는 입이 싱글거렸다. 주로 연구 작업을 하느라고 한 권의 책만 가져왔던 ‘턱 괴는 여자들’ 팀도 신이나 보였다. 

 

 

비어가는 주머니를 보면서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무엇이 이토록 도서전을 성행하게 만들었을까? 사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우리가 알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코로나로 대규모 행사에 가지 못했던 사람들의 욕망이 이곳에서 해소되는 중인가? 예상하지 못했던 흥행에 참여한 출판사들은 여러 가설을 내놓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 그들이야말로, 국제도서전을 흥하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생각했다. 단군 이래로 불황이라는 출판계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요즘 시대에 누가 책을 읽냐고 투덜거리면서도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책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더 좋은 책을, 더 깊은 주제로, 더 세밀한 시선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독립출판 제작자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번 도서전의 백미는 작은 출판사들이 모인 ‘책마을’이라고 보았다. 플랫폼 P의 입주기업이기도 한 해해북스, 임시제본소, 솜프레스 등의 작품을 비롯해 그림책, 퀴어책, 페미니즘책 등을 만드는 소규모 출판사들의 책이 눈에 띄었다. 특히 봄알람 출판사는 일관성 있는 주제, 철학이 엿보이는 기획으로 작은 출판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선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나도 임시제본소와 봄알람, 에디토리얼, 턱 괴는 여자들에서 책을 한 권씩 챙겼다. 

도서전에서 열리는 강연들과 기획전시의 주제도 탁월했다. 누군가는 이 시대를 반지성의 시대, 혐오의 시대라고 보지만 세상을 냉소적으로 볼 때면 도서전에 와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곳에서는 다양성과 지성이 존중받고 있으니. 차별이 사라지고 있으니. 특히 주제 세미나인 ‘지속가능하게 반걸음 앞서 살기’와 ‘동물이라는 존재와 새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불구의 언어로 쓰는 퀴어한 세계’가 인상 깊었다. 비슷한 사람이 모여서일까. 내가 생각하는 상식이, 이곳에서는 진짜 상식이었다. 차별하지 말 것, 혐오하지 말 것, 존중할 것, 지속가능성을 생각할 것, 다양성을 존중할 것, 함께 살 것.

 

 

책 읽는 사람이 줄어든 게 아니라, 책의 모양이 변한 것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베스트셀러라 하면 몇십만 부는 거뜬히 팔렸다. 지금은 3쇄만 찍어도 분야별 베스트셀러에 잠시 고개를 들이밀 수 있으니, 옛날이야기가 전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책은 없어질 거라고, 유튜브 시대에 누가 책을 읽겠냐고 고개를 젓는 이도 있지만, 책의 미래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도서전에 오면 알 수 있다. 

그중 두드러진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하나는 SF를 비롯한 장르문학의 대세다. 장르문학에서 발이 넓은 안전가옥 부스에서 나는 몇 가지 깊은 인상을 받았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책을 판매하는 직원들의 태도였다. 이 책은 어떤 점에서 재미있는지, 이 작가가 참여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 책의 설정은 무엇인지를 열성적으로 설명하는 그들의 모습은 애플숍에서 맥북을 판매하는 영업사원의 모습을 닮았다. 나는 홀린 듯 그 자리에서 책을 몇 권 구매했다.

다른 하나는 전자책, 오디오북을 비롯한 새로운 책의 형태에 대한 연구다. ‘책 이후의 책’에서는 ‘디지털 책의 공간, 책의 디지털 공간’, ‘책이 될 수 있는 것’, ‘아직 오지 않은 책’ 등을 주제로 전시가 열렸다. ‘지면에서 벗어난 디지털 시대의 작가들’에서는 SF작가로 유명한 곽재식, 설재인 등이 함께 했다. 오디오북을 체험할 수 있는 부스에서는 만화 ‘코난’의 성우들이 와서 애니메이션 그대로의 목소리를 재현해주기도 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기보다는, 책의 모양이 변한 것 같다. 이제 사람들은 텍스트를 종이에 인쇄된 책이라는 형태로만 소비하지 않는다. 책은 핸드폰 속으로, 노트북 위로, 음성으로, 앱으로 옮겨갔다. 매체의 성질이 책의 콘텐츠에 영향을 주는 것은 분명한 일이나, 그것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기는 어렵다. 우리는 변화하고 있을 뿐이다.

 

 

도서전은 내게 정말이지 축제였다. 책을 사랑하는 누구라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책을 만지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책을 만드는 사람들과 끝도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축제. 좋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지만, 무언가를 함께 좋아하는 일은 그보다 더 크게 행복한 일이다. 

우리 출판사는 이번 도서전에서 남들 기준에는 소박하지만, 우리 기준에는 역대급인 매출을 올렸다. 그거 팔아서 밥이 나오냐, 반찬이 나오냐 하는 타박에, 어깨를 피고 “쌀은 나온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수준이 된 것이다. 어쩌면 내년 국제도서전에는 엄마의 ‘그까짓 거 얼마 번다고’라는 말에 대꾸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다. 아마 나는 번 돈으로 또 다른 책을 사오고야 말 것이다. 그게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국제도서전에서 하는 일이니까. 그게 우리니까. 

 

 

박초롱│딴짓 출판사 대표. <어른이 되면 단골바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지>, <더 사랑하면 결혼하고 덜 사랑하면 동거하나요>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