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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아카이브 [DESIGN] 인쇄(1)
2022-08-24 / 김형진 / 워크룸 디자이너

[DESIGN]

2022년 PLATFORM P 웹진에서는 ‘워크룸’의 김형진 디자이너가 책의 만듦새와 그를 고려한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4편은 <인쇄(1) >입니다. 

 

 

구로구의 오래된 인쇄소에서 하이델베르크 5도 오프셋 인쇄기를 처음 보았을 때 이렇게 생각했다. ‘집채만 하네.’ 두 번째 보았을 때 그게 과장된 느낌이었다는 걸 바로 깨달았지만 처음 보았을 땐 정말 그렇게 보였다. 집채만 한 기계. 21세기 서울 한복판에서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를 마주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던 터라 그 풍경은 퍽 초현실적으로 보였다. (지금 서울의 오프셋 인쇄소들은 대부분 충무로에 집중되어 있지만 십수 년 전만 해도 구로와 성수 등에도 인쇄 단지가 있었다) 검은 기름이 잔뜩 낀 톱니바퀴가 돌아가며 하얀색 종이들을 내뿜고 있다는 것도, 기껏해야 손바닥보다 조금 큰 책을 만들기 위해 그렇게 큰 기계가 필요하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1.

시간은 울퉁불퉁하다. 누군가 A.I.가 인류를 위협하는 미래를 걱정하는 바로 그 순간에 다른 누군가는 질퍽한 진흙에 맨발로 들어가 모를 심고, 뜨겁게 달궈진 다리미로 옷 주름을 없앤다. 누군가는 자율주행 전기차로, 다른 누군가는 체인으로 연결된 두 개의 바퀴를 돌려야 움직이는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한다. 오전엔 인스타그램에 최적화된 정방형 홍보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픽셀 개수를 계산하고, 오후엔 120g 모조지에 인쇄되는 책 인쇄 감리를 보러 파주행 버스를 탄다. 그렇게 시간이 뒤섞여 현재를 만든다. 인스타그램이 현재라면 인쇄는 최소 100년 전의 과거다. 21세기에 우리가 하는 인쇄란 필연적으로 이런 식의 시차를 전제로 벌어지는 일이다. 

 

2.

구텐베르크 혁명. 인쇄를 그렇게 부르던 때가 있었다. 인쇄를 통해서만 대량의 정보를 싸고 빠르게 대규모로 전달할 수 있던 시절의 일이다. 등사기로 찍은 저질 인쇄물을 가방에 숨겨 육교에 올라가 뿌려대던 시절의 일이다. 지금 인쇄는 정보를 전달하는 가장 비싸고 거추장스러운 기술이 되었다.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인쇄기를 돌려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이제 없다. 여전히 인쇄가 현대 민주주의나 커뮤니케이션에 기여한다고 이야기하는 건 심각한 착각이며 말장난에 불과하다. 인쇄물(printed matter)은 조만간 ‘장인’들만 만들 수 있는 ‘공예’가 되어 소품 가게에서 사고파는 물건이 될 것이다.

 

3.

처음 디자인을 시작했을 때, 나는 나를 ‘그래픽 디자이너’라고 소개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조금 더 정확하게 이렇게 말한다. ‘인쇄를 기반으로 작업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인쇄를 기반으로 작업한다는 추가 문구엔 자부심과 동시에 어느 정도의 부끄러움이 뒤섞여 있다. 시류나 유행엔 신경 쓰지 않는다는 자부심, 현대 그래픽 디자인의 본령을 붙잡고 있다는 (착각에 가까운) 자부심. 동시대를 살고 있지 못하다는 부끄러움, 오래된 기술에 사로잡혀 갱신에 실패했다는 부끄러움. 오늘 내가 만드는 인쇄물은 이 두 가지 감정이 같은 비율로 배합된 혼합물이다. 

 

 

김형진│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2005년부터 1년간 안그라픽스에서 디자이너로 일한 뒤 2006년부터 현재까지 워크룸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