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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아카이브 [BOOKS] 잡지는 미용실에서 읽는 거 아닌가요?
2022-08-10 / 서지애 / 노말에이 대표

[BOOKS]

2022년 PLATFORM P 웹진에서는 독립서점 ‘노말에이’의 서지애 대표가 소규모 출판사들의 작지만 알찬 책들을 소개합니다. 5편은 <잡지는 미용실에서 읽는 거 아닌가요?>입니다. 

 

 

서점을 하기 전 잡지를 만드는 사회적기업에서 일했다. 광고를 관리하고, 홍보마케팅 업무를 담당했는데 편집국 기자들과 사무실을 같이 써서 기자의 일하는 방식을 관찰할 수 있었다. 잡지사는 마감일에 맞춰 한 달을 보낸다. 매번 새로운 아이템을 찾아내고, 조사 및 취재 후 백지를 가득 채우는 일을 어깨너머로 지켜봤다. 잡지 만드는 일은 어렵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노말에이에 들어오면 가장 안쪽에 천장 높이의 큰 책장 세 개가 나란히 있는데, 왼쪽부터 매거진, 에세이, 그래픽노블/만화로 분류했다. 책을 판매하면 재고를 채워 넣기 때문에 서가를 자주 들여다보게 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잡지를 찾는 독자 비율이 줄었다. 잡지 창간 시기에 열렬히 응원하던 독자들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신규 독자가 유입되기란 쉽지 않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잡지’를 검색했다. 잡지란 일정한 이름을 가지고 호를 거듭하며 정기적으로 간행하는 출판물. 책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내용의 글이 실리며, 간행 주기에 따라 주간,순간, 월간, 계간으로 나눈다. 서점을 운영하면서도 여전히 잡지를 만드는 건 보통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책을 만드는 데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지만, 일정한 발행 주기에 맞춰 책을 계속 내는 건 좀 더 공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에게 잡지란 패션지 또는 미용실에서 심심풀이로 읽는 책일지 모른다. 이번 연재에서는 그 선입견을 깰 수 있는 잡지를 소개한다. 한 주제를 갖고 다각도로 깊이 있게 탐구하는, 멋지고 재밌는 잡지가 많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다. 

 

 

<슈퍼마켓>은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슈퍼마켓을 통해 여행을 해석하고 그 안에서 사람과 문화를 이야기하는 새로운 개념의 도시여행 총서다. 매번 하나의 도시를 선정하고 그곳의 슈퍼마켓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외국의 슈퍼마켓에서 낯선 언어로 가득한 상품과 식재료를 구경하고 있자면 잠시나마 현지인이 된 것 같다. 여행의 설렘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라는 점에서 제호가 눈에 띈다. <슈퍼마켓>은 현재 2호까지 발행했는데 1호는 대만의 타이중, 2호는 하와이 빅아일랜드다. <슈퍼마켓>의 표지에는 마트에 가지런히 진열된 상품 사진이 있다. 처음 보는 제품이기 때문에 무슨 맛일지 패키지의 그림을 보고 상상하게 된다. 표지 앞날개를 펴면 일반적인 책처럼 종이가 일직선으로 재단되어 있지 않고, 슈퍼마켓 천막처럼 동글동글 모양 나 있는 형태가 재치 있다.

 

1호 타이중 편에서는 슈퍼마켓을 크게 4곳(전통시장, 슈퍼마켓, 편의점, 야시장)으로 분류해 소개한다. 현지인이 대만의 슈퍼마켓에서 꼭 사야 할 제품을 추천해 주는 기사도 있다. 타이중은 대만을 대표하는 디저트인 태양병과 버블티가 시작된 곳이다. 식문화뿐만 아니라 타이중의 역사와 근대문화유적, 트렌드를 이끄는 명소, 신도심, 현지인 인터뷰도 읽을 수 있다. 잡지 1권으로 타이중의 윤곽을 그릴 수 있다. 

 

 

<goeul 고을>은 저마다 뚜렷한 사회문화적 특성과 매력을 지닌 우리나라 지역의 식문화를 여행하는 단행본 시리즈다. ‘음식을 통해 지역을 여행한다’는 콘셉트로, 국내 한 지역을 방문해 역사와 전통, 음식, 제철 식자재 등을 경험하고 풀어낸다. 오랜 전통을 이어 현재까지 식문화를 일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지역의 삶의 모습과 가치를 생생하고 깊이 있게 소개한다. 현재 4호까지 발행했고, 1호는 경주, 2호는 담양, 3호는 강릉, 4호는 대구다. 관광도시와 그렇지 않은 도시를 번갈아 취재하고 있다.

 

<goeul 고을>(이하 고을)은 그동안 찾기 어려웠던 예쁜 국내 여행 잡지다. 내용도 탄탄할 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책장에 꽂아도 오브제가 되는(책은 읽어야 책이지 왜 인테리어 소품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순 없지만, 시류에 편승해 말해보자면) 잡지다. 가장 추천하는 호는 2호인 담양이다. ‘담양은 관광하기 좋은 도시인가?’라는 의문을 느낌표로 만들어 주었다. 고을을 만든 로우프레스 편집부도 담양에 관한 정보가 많지 않아 취재에 애를 먹었는데, 취재처 리스트를 작성 후 담양군청에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여행자들에게만 인기 있는 곳인지, 지역 주민들이 실제로 자주 들르는 곳인지 교차 확인 후 취재를 시작했다. 

 

‘음식을 통해 지역을 여행한다’는 콘셉트에 맞게 지역의 식당을 LOCAL SHOP, TRENDY SHOP으로 나눠 잡지의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그 지역의 오래된 식당을 먼저 소개하고, 새로 생긴 젊은 가게를 나중에 소개하는 점도 마음에 든다. 편집자들이 가게마다 정성스럽게 적어 내린 글을 읽는 재미가 있다. 음식의 유래, 식당의 역사, 경영 철학 등에 대해 알 수 있어 여행이 풍부해진다. 

 

우리 문화와 정서를 보존하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이르는 시간을 아우르는 곳. 오래된 가게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그런 의미를 가진다. 신식당 역시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떡갈비 본가의 명맥을 유지하며 많은 사람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 첫걸음은 1910년에 시작됐다. 남다른 음식 솜씨로 소문이 자자하던 고 남광주 할머니는 마을에 큰 잔치가 있을 때면 다진 고기로 화로에 구운 갈비를 준비했다. 그 맛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의 권유로 자그마한 식당을 차렸다.  / 72p ‘신식당’

 

오랜 세월을 이어온 것일수록 매일 쓸고 닦은 흔적은 더욱 윤이 나기 마련이다. 멀리서도 단정한 자태가 눈에 들어오는 전통 찻집 명가은은 담양의 남쪽 가사문 학면에 자리한다. 대문 안 작은 연못, 네 채의 한옥, 그 한옥을 둘러싼 마당 정원과 곳곳의 소나무 모두 누군가 쓸고 닦은 손길을 거쳐 정갈한 모습으로 잘 어우러져 있다. / 76p ‘명가은’

 

고을의 가장 큰 매력은 오래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그리고 아름답게 소개한다는 것이다. 고을에는 젊은 사람보다 장년층(50-64세) 이상 어른들의 모습이 더 많이 등장한다. 잡지의 시작에는 ‘TRADITIONAL’이라는 지면이 있는데 전통을 이어가는 이들의 인터뷰를 싣는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경주의 교동법주, 담양의 유영군 명인(쌀엿과 한과 제조), 강릉의 토담순두부, 대구의 삼송빵집 등의 인터뷰를 읽으면 ‘내가 너무 조급하게 사는 건 아닌가? 여유를 좀 가져볼까?’ 하는 마음이 절로 든다. 대를 이어 세월을 보낸 이들의 말에는 무겁고 강한 힘이 있다.  

 

블로그나 SNS에도 여행 정보가 많지만, 광고와 콘텐츠를 구분하기 어렵다. 가게의 운영시간 등 유동적인 내용은 인터넷에서 검색하는 것이 더 최신 정보일 수 있지만, 그 도시의 역사, 문화에 관한 신뢰할 수 있는 정보는 책에 있다. 무엇보다 ‘솔직후기, 핫플, 내돈내산’이라는 말을 보지 않아도 되고,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직원이 퉁명스럽다, 상품 종류가 적다, 음식 간이 안 맞다 등)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언젠가부터 여행을 가면 이것 다음에 저것을 꼭 해야 한다는 강박과 지나친 사전 정보 때문에 피곤을 느끼곤 한다. 그 연유에 대해 생각해보니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의 여행 방식을 답습하는 것이었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여행인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럴 땐 양질의 여행 잡지가 도움이 된다. 고을 한 권 들고 떠나는 국내 여행을 꼭 권하고 싶다. 

 

 

<어반라이크>는 동시대 도시, 문화, 창작자들의 현재를 기록하는 잡지다. 매 호 판형(책의 크기)과 형태를 다르게 제작하여 소장 욕구를 자극한다. 가장 최근 호인 43호의 주제는 ‘아트 컬렉터 입문기’로 잡지와 하얀 장갑을 함께 상자에 넣었다. 종이책의 한계에서 벗어나 물리적 영향을 받지 않은 유동적인 매체라는 특성을 살려 ‘지면 전시’라는 새로운 역할을 시도한 것이다. 잡지를 읽기 전 동봉된 장갑을 끼고 예술 작품을 보는 것처럼 잡지 읽기를 의도했다. 42호인 ‘책 만드는 곳, 출판사’에서는 출판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는데 주제에 대해 좁고 깊게 파고드는 방식이어서 그런지 독자의 반응도 좋았다. 

 

42호에서 인상적이었던 기사는 열화당 이수정 실장의 인터뷰다. 열화당은 오십 년 동안 인문주의적 예술출판을 해온 출판사다. 처음엔 옛 문헌의 복각 작업으로 시작해 발행인이 관심을 가져온 미술 영역에 집중해 책을 만들었다. 책의 역사를 지키고 시대를 기록해야 한다는 의무를 가진 출판사의 인터뷰 하나를 읽는 것 만으로도 이 잡지를 보는 게 값지게 느껴진다. 

 

책이란 것이 현대 사회에서는 돈으로 사고파는 상품이 되었지만, 본래는 지식을 기록하고 보전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이백 년 전, 선교장 열화당에서의 책을 상상해보아도 알 수 있죠. 물론 그땐 권력자들이 문자와 매체를 독점하면서 지식 또한 공평하게 기록으로 전달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다만 지금은 새로운 권력인 자본주의에 많은 자리를 내어주고 있는 만큼, 책 본래의 존재 이유를 잊지 않는 균형감각을 지녀야 한다는 뜻입니다. / 75p

 

 

<프리즘오브>는 매 호 한 영화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담는 계간 영화잡지다. ‘영화를 소비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한다’는 슬로건으로 현재 22호까지 발행했다. <프리즘오브>는 창간호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편을 보고 먼저 출판사에 연락해서 서점에 소개하게 된 잡지다. 그때가 2015년도였는데, 지금도 발간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프리즘오브의 팬으로서 자부심이 있다(!).

 

프리즘오브가 오랫동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는 운영 방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프리즘오브는 작품성과 다양성, 시의성을 고려해 영화를 선정한다. 끊임없이 이야기가 재생산될 수 있는 영화를 고려해 책을 만든다. 또한 프리즘오브는 2가지 종류의 표지를 발행한다. 한정판 표지는 일정 기간에만 구입할 수 있고, 그 기간이 끝나면 일반판 표지만 살 수 있다. 한정판과 일반판 표지가 동일한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는 한정판에 포스터가 동봉된다는 옵션 등이 있다.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은 독자라면 한정판 표지를 소장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특별한 잡지가 되고, 확고한 팬층이 생긴다. 

 

이번 연재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걸 열정적으로 친구에게 설명하듯 책 소개를 하고 싶었다. 글의 앞부분에서 언급한 것처럼 잡지를 찾는 사람이 줄었기 때문이다. 서점에는 이번에 소개한 잡지 외에도 밀도 있고 완성도 높은 잡지가 많다. 지속적인 관심과 지지가 있다면 이런 멋진 잡지들이 계속해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서지애│노말에이 대표이자 디자인스튜디오 일삼일와트의 디자이너. 혼자 조용히 책 읽는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