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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아카이브 [BOOKS] 좋아하는 것을 수집하고 공유하는 책
2022-09-13 / 서지애 / 노말에이 대표

[BOOKS]

2022년 PLATFORM P 웹진에서는 독립서점 ‘노말에이’의 서지애 대표가 소규모 출판사들의 작지만 알찬 책들을 소개합니다. 6편은 <좋아하는 것을 수집하고 공유하는 책>입니다. 

 

 

소소한 것, 언뜻 무용해 보이는 것, 스스로에게만 흥미로운 것을 모으는 재미를 아는 사람은 삶을 훨씬 풍부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수집가만큼 즐거운 생물이 또 없고, 수집가의 태도는 예술가의 태도와 맞닿아있다. 항상 다니는 길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사람들, 자신이 사는 곳을 매일 여행지처럼 경험하는 사람들이 결국 예술가가 되니까.

정세랑,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위즈덤하우스, 2021, 95p. 

 

친구들은 만화책을 모으고, 카페의 컵홀더를 모으고, 마그넷을 모은다. 여행을 기억하고 추억하기 위해 수집하기도 하고, 단순히 흥미롭고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책이나 잡지에서 누군가 수집한다고 말하면 초라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는 좋아하는 게 하나도 없는 시시한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작은 조각을 모으다 보면 나를 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알아간다는 건 살아가는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취향을 대변하는 물건이 무엇이 있을까? 고심 끝에 책 제목에 ‘여름’이 들어간 책을 모으기 시작했다. 여름과 책을 좋아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인 것 같다. 『여름으로 가는 문』, 『여름의 빌라』, 『두 해 여름』, 『바깥은 여름』,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사실 이 책들은 사무실, 본가와 집의 책장에 분산되어 있으므로 수집이라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덕분에 책을 더 많이 읽게 되었다. 그중에는 ‘여름’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지 않았다면 몰랐을 책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영역이 한 층 넓어진 것 같다. 꼭 무언가를 모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복잡한 인생에서 무용한 취미 생활 하나쯤 갖는 건 괜찮은 일이 아닐까. 

 

무언가에 깊이 파고드는 사람들이 있다. 좋아하는 것을 관찰하고 발견해 끈기 있게 수집하는 사람들은 어느샌가 좋아하는 것을 넘어 잘 알게 되고 잘하게 된다. 관찰과 발견이 경험의 확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취향이 쌓여 자신만의 관점이 되고, 그 관점이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주기도 한다. 이번 달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수집하고 공유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책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산책, 서울의 글자들』은 서울의 디자인을 담은 책이다. 서울 각종 상점의 간판과 사인물 그리고 그 안의 타이포그래피 사진을 수록했다. 상점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파사드(건축물의 정면부)에는 로고, 디스플레이 방식, 간판, 조경, 인테리어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요소가 건물 또는 가게의 인상을 좌우한다. 저자인 유현아 디자이너가 서울의 곳곳을 직접 촬영해 성수, 을지로, 한남·이태원, 신사, 상수·합정·망원, 연희·연남, 청담·압구정으로 분류해 소개한다. 다양한 시각적 경험을 한 권의 책으로 살펴볼 수 있다. 

 

저자는 디자인 비전공자로 뒤늦게 그래픽 디자이너가 되었다. 실무에 부딪히면서 스스로 일을 배우는 방법을 찾았고, 그 과정과 결과를 공유하고 싶어 이 책을 만들었다. 스스로에게도 또 다른 사람에게도 레퍼런스가 될 수 있는 유의미한 작업을 하고자 했다. 디자이너들이 참고 자료로 사용하면서 메모하기 쉽도록 PUR 제본(펼침성이 좋지 못한 무선 제본의 보완점을 개선한 제본 방법)을 해 180도로 펼쳐지게 신경 썼다. 두꺼운 책에 빼곡히 수록된 사진을 보면 걷고 또 걸으면서 고군분투한 시간이 느껴진다. 저자는 50년 이상 된 오리지널 빈티지 제품 속 타이포그래피를 모은 『SAUCE』라는 얇은 책도 만들었다. 오래전 제품 디자인에서 핀터레스트나 인터넷에선 찾을 수 없었던 영감을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Beautiful Inventory A-20』은 158종류의 빈티지 테이블웨어(식탁에서 사용하는 식기류) 사진을 수록한 책이다. 각 사진 하단에는 빈티지 컬렉션의 통상적인 명칭, 크기, 브랜드, 제조국을 기록했고 제품에 브랜드나 제조국 표기가 없는 경우 이를 생략했다. 이 책은 디자인스튜디오 서커스보이밴드에서 발행했다. 직접 수집한 테이블웨어를 공유하고 정리하려는 방법으로 사진과 책이라는 형태를 선택한 것이다. 여러 나라에서 만든 다양한 형태의 컵, 그릇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시각적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제품 생산 당시에는 평범하고 보편적으로 사용했을 테이블웨어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수집가의 취향과 선택으로 동일 선상에 놓임으로써 또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물건으로 재탄생 한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의 디자인과 컬러, 패턴, 프린팅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다.

 

 

『영화 속 샌드위치 도감』은 1980년대부터 2010년대의 해외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샌드위치 등장 장면을 수집한 책이다. 해외 영화 총 70편에서 샌드위치가 등장하는 장면과 해당 장면에 얽힌 서사를 기록했다. 저자인 주혜린 디자이너는 샌드위치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샌드위치’에 관한 광적인 수집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샌드위치 뿐만 아니라 영화도 사랑하는 게 분명하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모든 영화를 끝까지 시청하고 책에 수록했다. 이 책은 샌드위치 속재료를 확대한 표지 사진과 책등의 일러스트와 같이 책디자인도 분명 눈길을 사로잡는다. 

 

<아메리칸 셰프>(2014)에 등장하는 쿠바 샌드위치, <패딩턴>(2014)의 마멀레이드 잼을 바른 샌드위치처럼 샌드위치가 주요 소재로 등장한 영화와 <분노의 질주>(2001)의 참치 샌드위치,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2007) 아거스 필치의 샌드위치처럼 샌드위치가 스쳐 지나가는 영화까지 포함했다. <꾸러기 클럽>(1994)의 고양이 화장실용 모래 샌드위치처럼 먹지 못하는 샌드위치도 존재한다.

 

 

『(멋) MUT : Street Fashion Of Seoul』은 장년 및 노년층의 스트리트 패션 사진집이다. 스트리트 패션이란 흔히 길거리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의 패션 스타일을 말한다. 저자인 김동현 사진작가는 어릴 적부터 옷을 좋아했고 힙합퍼, 무신사의 스냅사진과 『사토리얼리스트』(스콧 슈만의 스트리트 패션 사진집)의 영향을 받았다. 서울의 이곳저곳에서 멋있는 어르신들이라면 가리지 않고 사진을 찍었고, 2년 6개월 동안 필름 카메라로 찍은 6천 장이 넘는 사진 중 일부를 엮어 이 책을 발행했다. 

 

책의 첫인상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피사체의 당당하고 자신 있는 태도다. 길을 걷다 만난 젊은 사람의 요청으로 자세를 취했다고 하기엔 너무나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동안 길에서 놓치고 있던 노인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멋진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았단 말이지! 감탄하며 책장을 넘기다 보면 리듬감이 느껴진다. 전신사진과 신발, 모자 등 액세서리를 확대한 사진의 구성과 비율이 적절하다. 젊은 사람들의 패션에는 유행하는 브랜드와 스타일이 보이는데, 어른들의 옷차림에선 그런 게 보이지 않아 더 자유롭게 느껴진다. 이것이 진정한 스트리트 패션이 아닐까. 

 

 

그동안 웹진에 5편의 글을 쓰면서는 주제를 먼저 결정하고 소개할 책을 골랐다.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가 자연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제를 떠올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연재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자 부담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대신 여러 권의 책이 떠올랐다. 이렇게 마음을 유난히 사로잡는 것들이 있다. 머릿속에 두둥실 떠다니는 책의 이미지를 모으니 ‘수집과 영감’이란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었다.

 

영감은 창조적인 일에서만 필요한 영역이 아니다.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하고 삶을 좀 더 재밌고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역할도 한다. 반복적인 생활이 지루하다면, 새로운 감각을 느끼고 싶다면, 좋아하는 것을 수집한 책을 찾아보길 바란다. 종종 서점에서 책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하는 손님을 만난다. “친구에게 선물할 책을 골라 주실 수 있나요?” 보통은 주위 사람에게 선물하기 위해서다. 색다른 가상의 질문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이디어가 고갈되어 영감을 받고 싶어요.” 누군가 이런 요청을 한다면 신이나 이 책들을 추천할 것이다.  

 

 

서지애│노말에이 대표이자 디자인스튜디오 일삼일와트의 디자이너. 혼자 조용히 책 읽는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