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
2022년 PLATFORM P 웹진에서는 ‘워크룸’의 김형진 디자이너가 책의 만듦새와 그를 고려한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5편은 <인쇄(2) >입니다.
인쇄를 복제(reproduction) 기술이라 부르는 건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정확한 묘사는 아니다. 복제의 사전적 정의는 "본디의 것과 똑같은 것을 만듦"인데 인쇄에 있어 '본디의 것'이란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모나리자를 복제하는 화가에게 본디의 것이란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원작이겠지만 인쇄의 세계에선 이에 해당하는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쇄용 파일이나 CTP 판은 그 물리적 현실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본디의 것'이 될 수 없다. 말하자면 인쇄의 세계에선 서로가 서로의 원본이고 동시에 복제물로 기능한다. 발터 벤야민의 말을 빌려보자면 우리가 처한 상황이란 대충 이런 것이다.
“사진의 원판으로부터는 여러 개의 인화가 가능하다. 어느 것이 진짜 인화냐고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1.
따라야 할 원본이 없다는 건 불안한 일이다. 성경을 빼앗긴 기독교도, 혹은 법전을 빼앗긴 판사의 기분이랄까. 무엇을 근거로 너무 붉다거나 너무 푸르다고, 혹은 너무 진하거나 옅다고 말할 것인가. 이런 불안함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히기 위해 가제본, 인디고 출력물 따위를 만들기도 하지만 이 또한 근본 없기로는 매한가지다. 복제가 복제를 참조하는 연쇄 고리. 이것이 인쇄의 근본 속성이다.
2.
원본이 부재하다는 건 모든 인쇄물이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는 뜻이다. 1쇄라고 해서 2쇄보다 가치 있지 않고, 가장 먼저 제본된 책이라고 해서 1000번째로 만들어진 그것보다 귀하지 않다. 인쇄물의 가치는 1/n의 방식으로 매겨지지 않는다. 인쇄물에도 한정판(limited edition)이란 것이 있지만 이는 인쇄물의 속성과는 무관한, 공급을 조절함으로써 가치를 인위적으로 조절하려는 노력에 불과하다. 100권 한정판 책이라고 해서 1만 권을 찍은 책보다 아름답거나 고귀할 리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자면 가을마다 서울에서 열리는 아트북 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무한정판)'의 작명은 감탄스러울 만큼 적절하다.
3.
인쇄가 잘 된 책을 보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인쇄가 예술이네!" 흔한 상용구를 동원한 악의 없는 칭찬일 뿐이지만 듣는 마음이 마냥 기쁘거나 편하지는 않다. 인쇄는 예술이 아니며, 그걸 목적으로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잘된 인쇄라고 해서 예술품이 되는 것도, 망친 인쇄라고 해서 폐지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인쇄는 초월 혹은 상승 의지가 없는 세속의 기술일 뿐이다. 원본을 따질 필요가 없는 복제품만 가득한, 부모가 누군지 물을 필요 없는 사생아의 세계. 되돌아갈 기원이나 추구할 깊이가 없는 평면의 세계. 인쇄가 여전히 현대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김형진│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2005년부터 1년간 안그라픽스에서 디자이너로 일한 뒤 2006년부터 현재까지 워크룸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