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S]
2022년 PLATFORM P 웹진에서는 운영사무실 스태프들이 재밌게 읽은 책을 한 권씩 안내합니다. 9월의 책은 『반려공구』,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눈,물』입니다.
내겐 평소 그렇게 중요하진 않지만 그래도 알아두면 언젠간 써먹을 것 같은 그런 형태의 지식을 얻게 됐을 때 느끼는 기쁨이 있다. 특히 얼핏 봐서는 이유를 모르겠거나 그냥 지나칠 만한 어떤 디테일들이 사실 명백한 이유가 있었다는 걸 찾아낼 때에 관심이 있다. 가령 원예용 전지가위는 왜 날이 한쪽에만 있는 것인지, 일명 ‘목수연필'은 왜 단면이 납작한 사각형인지, 왜 치즈 나이프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지와 같은 이유를 알게 되고 나면 과거의 나보다 아주 조금은 똑똑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런 맥락에서 <반려공구>는 내게 다채로운 즐거움을 주는 책이었다. 모호연 작가의 문장은 그 자체로 경쾌한 리듬감이 있어 읽는 과정부터 즐거웠다. 또한 공구별로 각각의 사용법이나 기능, 원리 등을 알기 쉽게 기술하고 있어 공구에 크게 관심이 없던 이들에게는 쉽고 친절한 매뉴얼처럼 기능한다. 이에 더해 내게는 평소 궁금하긴 했는데 찾아보기 귀찮거나 도무지 적합한 검색어를 찾지 못해 몰랐던 사실이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조금 사소하지만 새롭고 유익한 정보들을 접하면서 느낀 기쁨이 무척 컸다. 특히 각 공구가 가진 특징이나 디테일마다 오랜 시간을 거쳐 내려온 삶의 지혜나 혹은 누군가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공구의 부분마다 녹아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몇몇 순간들은 경이롭기까지 했는데, 이 책을 통해 새로 알게 된 지식 중 가장 놀라운 것은 줄자의 끝부분의 갈고리가 왜 약간의 여분을 두고 헐렁하게 고정되는지였다(갈고리 자체의 두께만큼 움직여서 오차를 줄이는 용도라고 한다). 이외에도 ‘빠루’는 왜 빠루라는 이름을 갖게 됐는지, 드릴 비트에 있는 알파벳과 숫자는 어떤 의미인지 등 조금 사소하면서도 새삼스럽지만 흥미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됐다. 또 한편으로는 평소 전혀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정확하게는 용도를 제대로 알지 못해 써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공구들의 기능과 용도에 대해서도 익힐 수 있게 됐고, 적어도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이제 적어도 집 안의 어떤 것이든 고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을 가질 수 있었다.
<반려공구>에는 총 21개의 공구를 다룬다. 그리고 그 중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공구는 다름 아닌 ‘왼손과 오른손'인데, 마지막 챕터의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 조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는 내내 공구 자체에 대해서만 생각했지, 정작 이 모든 공구를 조작하고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도구인 ‘손’을 어떻게 활용하고 가꿔야 하는지는 놓치고 있었는데 책을 끝까지 읽고 나니 새삼 손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기원(PLATFORM P 매니저)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던 2021년, 움직이기와 이동 특히 걷기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걷기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속도의 이동이다. 한 블록마다 몇 대씩 줄지어 서 있는 전동 킥보드를 보며 내 다리를 직접 움직여 걸으면 스스로가 답답하게 느껴지곤 한다. 그렇지만 이 낮은 속도만이 내 눈이 허락한 가장 높은 해상도로 주변 풍경을 불러온다. 전동 킥보드를 탄다면, 자동차를 타고 달린다면, 기차와 비행기에 오른다면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급속도로 뿌옇게 흐려진다.
이 흐린 시야 속에서 나는 자주 책을 읽는다. 광역버스 9401번, 2호선 을지로입구역과 홍대입구역 사이에서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의 대부분을 읽었고, 밀라노로 향하는 비행기 안과 볼로냐와 밀라노를 오가는 기차 속에서 마지막 챕터를 마무리했다. 작가 정지돈이 책에서 “아무튼 나는 한 번도 책상에서 마음에 드는 독서를 한 기억이 없다. 대부분 정보 습득, 자료 수집, 연구 따위를 위한 독서였다. 인생에서 가장 완벽한 도서는 대부분 이동 중에 일어났다.” 라고 했을 때 나는 더할 나위 없이 공감했다. 도착 시간이 정해져있다는 약간의 압박감과 좁은 공간, 흔들리는 시야처럼 물리적인 괴로움 속에서 읽던 책들이 나에겐 일종의 미션이자 탈출구였다. 소파와 침대 위에서보다 이동 속의 독서가 훨씬 재밌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 2년간 도서 판매량은 괄목할 정도로 늘었다.(‘코로나 집콕에 도서 판매량 껑충’, 한국경제, 2020.10.12., ‘코로나 시대, 도서 판매량 늘었다’, 아시아경제, 2022.06.27.) 언뜻 보면 집 안의 안락한 소파와 의자, 침대에서 책을 읽는 아늑한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쩌면 이 시기 집에서 하는 독서는 바이러스가 창궐한 세상에서 탈주하는 ‘이동’의 독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안원경(PLATFORM P 매니저)
타인이 있기에 내가 존재하지만 타인보다 내가 우선이 되는 순간이 많은 요즘, 그저 하루하루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을 꾸역꾸역 살아내며 주변에 맴도는 사랑을 인지하지 못한 채 상처 주고 상처받으며 눈 감았던 요즘, 참 건조하고 삭막했던 요즘을 보내는 사람이 있다면 조용히 안겨주고 싶은 책이다.
어느 겨울밤 한 여자가 ‘어쩌다’가 ‘눈아이’를 낳는다. 여자의 품에 안긴 ‘눈아이’는 따뜻한 여자의 체온에 녹아내리고 여자는 그런 ‘눈아이’를 지키기 위해 거리를 두게 된다. 시간이 흘러 그들이 사는 곳 너머로 계절의 변화가 시작되고 ‘눈아이’는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이때 여자 앞에 ‘언제나 겨울’이라는 광고지가 떨어진다. 여자는 자신의 ‘눈아이’를 지키기 위해 ‘언제나 겨울’이 있는 곳으로 달리고 달린다.
여자가 도달한 곳이 도시로 바뀜과 동시에 책의 용지도 함께 바뀐다. 반질반질한 광택지는 도시의 형형색색의 간판을 더 돋보여준다. 유난히 눈에 띄는 ‘paradise’, ‘낙원’, ‘당신을 위한’ 과 같은 간판 문구와 서로의 체온 걱정 없이 북적거리는 거리를 걷는 사람들 속에 혼자 있는 여자의 모습,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가는 여자의 손을 대뜸 잡아 호객하는 장면은 여자가 자신의 ‘눈아이’를 잃을까 봐 함부로 손대지 못하는 모습과 대비되어 보이기도 한다.
여자가 도착한 도시에서 제안하는 ‘낙원’은 너무나도 많지만 여자에게 필요한 ‘당신을 위한 낙원’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낙원’은 오히려 여자가 지키고자 하는 걸 서서히 앗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두 가질 수 있는’ ‘낙원’ 에서 ‘눈아이’를 구할 수 있는 ‘언제나 겨울’까지 손에 얻었지만 그 모습이 더 서늘한 건 왜였을까.
사랑은 늘 ‘눈아이’처럼 ‘어쩌다’ 찾아오고, 대부분은 그 ‘어쩌다’ 찾아온 사랑을 어렵게,어렵게 지켜내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지켜낼 수 있는 곳이 그 어디에도 없는 ‘당신을 위한 낙원’일 것이다.
‘지키는 사랑은 왜 언제나 그렇게 어려운 걸까?’라고 질문을 던진 정세랑 작가의 추천사가 맴도는 책이다. 그 질문을 곱씹다 보니 다시 주변이 고요해지는 것 같다.
김소연(PLATFORM P 매니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