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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아카이브 [SPECIAL] 모여서 더욱 빛나는
2022-10-26 / 양다솔 / 작가

[SPECIAL]

2022년 PLATFORM P 웹진은 출판계의 크고 작은 흐름들을 들여다보는 특집을 매달 선보입니다. 10월 특집글은 양다솔 작가가 지난 8월 23일부터 10월 8일까지 PLATFORM P 2층 북앤라운지에서 열렸던 출판문화 심포지엄 연계 전시 ⟪흐르고 모여 이어지는 책들 - 총서의 지형학⟫을 감상하고 작성한 <모여서 더욱 빛나는>입니다. 

 

 

우리나라 출판계의 부흥은 전집과 함께 시작되었다. 급속화된 근대화와 함께 교육에 열을 올리던 7~80년대 사람들에게 기본 교양을 갖추기에 가장 손쉬운 것은 전집을 구매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사서 벽 한쪽 가득 꽂아놓기만 해도 벌써 기품있는 집 같아 보였으니까. 그러니 ‘총서’라는 단어를 듣고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은 세계문학전집이었다. 어린 시절 집 책장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스무 권 혹은 마흔 권까지 이어지는 세계문학전집, 과학 전집 등 온갖 기상천외한 전집이 떠올랐다. 총서라는 단어 자체를 독립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려 본 것은 이번 전시를 만나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흐르고 모여 이어지는 책들 - 총서의 지형학》/ 2020.07.05.~10.08. / ©타별(tabial)

여름의 끝에서 시작해 가을이 시작될 때까지 한 절기가 바뀌도록 PLATFORM P 북앤라운지를 장식한 전시는 《흐르고 모여 이어지는 책들 - 총서의 지형학》이다. PLATFORM P는 매년 변화하는 출판 지형의 지식과 경험을 나누는 출판문화 심포지엄을 개최하며, 올해 주제는 ‘총서’를 삼았다. 같은 이름으로 기획된 이 전시 또한 심포지엄 연계되어 기획되었다. 3일간 개최된 심포지엄에서는 편집, 디자인, 협업이라는 키워드로 최근 몇 년간 주목받아온 다양한 총서들의 더욱 깊고 다채로운 이면을 살폈다. 심포지엄이라는 굵직한 이벤트와 긴 호흡의 전시가 함께 진행되어 그야말로 총서라는 키워드를 다양한 방식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전시는 8월 23일부터 예정된 기간보다 연장되어 10월 8일까지 넉넉한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기획의 전시이며 형태 또한 그림이나 음악이 아닌 책이라는 점에 있어 전시 기간이 길었던 점, 관람객이 특별한 경계 없이 자유롭게 오가며 열람할 수 있었던 것이 특히 적절했다. 책이 궁금할 때마다 재방문할 수 있었고, 북앤라운지에서 작업을 하다가 휴식을 취할 때마다 살펴볼 수 있었다.

 

©타별(tabial)

모아진 문장들. 총서는 모일 총(叢)자를 과 글 서(書)를 쓴다. ‘총 몇 명’이라 할 때 쓰이는 모두 총(總)을 쓰는 줄 알았는데, 꽃다발을 모은다고 할 때 쓰는 모일 총을 쓴다고 한다. 심포지엄 마지막 순서로 진행되고 웹진에도 공유된 김현호 센터장님의 <총서의 몇 가지 풍경들>은 총서를 주제로 뜻과 함께 총서 자체에 대한 이해를 매우 높여주니 일독을 권하고 싶다. 총서란 일정한 형식과 체재로 계속 출판되어 한 질을 이루거나, 또는 통일되지 않은 가지가지의 책들을 모으는 것을 말한다. ‘총서 큐레이팅 - 위로 아래로 옆으로’라는 부제를 가진 이번 전시는 특히 총서가 ‘어떤 방식으로’ 모였는가에 주목했다. 국내에 출판되어 온 다양한 총서 중에서도 세심하게 선별된 160여 권의 총서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시도되어 온 총서를 심층적으로 리서치하고 독창적인 기준을 세워 분류하고 선별하여 지도의 형태로 제시하기도 했다. 우리가 쉽게 접하고 혹은 접하지 못했던 다채로운 총서를 한곳에서 살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전시의 제목, 총서의 지형학이란 이름과 같이 지금까지 현재 국내에 조재하는 총서들의 분포도와 특성을 조망할 수 있었다.

 

넓고 다양하게 퍼져있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 총서를 지형학으로 펼쳐내기가 무척 쉽지 않았을 것인데, 결과는 아름답기만 하다. 전시 큐레이팅을 맡은 프로젝트 연구팀 ‘턱 괴는 여자들’의 대표님께 지나듯 여쭤보니, 분류의 기준을 세우는 일에 가장 오랜 고민을 했다고 말씀하신다. 문학, 장르문학, 에세이, 서한집/구술집, 비평, 실용, 제안적 탐구, 이론서라는 8개의 갈래로 문학과 비문학 사이를 나누는 글의 갈래가 X축의 기준점이 되었다. Y축은 연구 주체의 주관과 새로움으로 삼았다. 고전을 재해석하면서, 주변의 것을 큐레이션 하는 기준을 설정하면서, 동시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안하면서, 더 넓게는 세계관을 확장하면서 총서가 사용된 경우를 추려냈다.

 

©타별(tabial)

그렇게 탄생한 총서의 지도를 따라 전시를 여행할 수 있었다. 보자마자 놀랐던 것은 ‘이토록 많은 총서가 있다니’하는 생각이었다. 서점에서는 총서를 모아서 볼 수 있기보다는 단권으로 접하기가 쉬운데, 반짝이는 별 하나만 보다가 그 한 권의 점이 이루고 있는 선, 그것이 만들어낸 별자리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책이라는 것은 한 가지 주제로 엮인 이야기의 타래이지만, 한 걸음 떨어져서 보니 또 하나의 거대한 문장 속에 속한 단어 같아 보이기도 했다. 지형학에서 분야마다 두각을 나타내는 특징적인 총서 21개를 만나볼 수 있는데, 책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한 번쯤 만나보았을 총서부터 처음 만나는 총서, 어딘가 꼭 있었으면 했던 총서까지 총천연색이었다.

 

©타별(tabial)
©타별(tabial)

총서 하면 쉽게 떠올렸던 세계문학전집이나 00작가 전집보다도 출판사 자체의 색이 드러나고 기획자의 빛나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총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는 사람은 아는 민음사의 ‘쏜살 문고’부터 알짜배기 실용서로 알려진 유유출판사의 ‘땅콩 문고’와 워크룸프레스의 ‘실용총서’, 서한집의 열풍을 일으킨 읻다의 ‘상응’, 디자인부터 시도까지 아름다운 시간의흐름 출판사의 ‘말들의 흐름’까지. 평소 지켜보던 총서들의 볼륨이 어느새 두터워진 것을 보며, 출판사의 행보와 성장, 점차 단단해지는 총서의 완성도 등이 시각적으로 보여 몹시 즐거웠다. 한 편한 편 한 모여 가족처럼 모아놓으니 디자인의 통일성과 출판사의 시각적 정체성이 한눈에 보였으며, 기획자가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이 조금씩 엿보이는 듯했다.

그 외에도 ‘한국근대대중문학 총서 틈’과 ‘한국 현대건축의 기록 시리즈’, ‘만화·웹툰이론총서’, ‘코기토 총서’, ‘밀리터리 클래식’, ‘동남아시아문학총서’는 이번 전시에서 처음 접하게 되었다. 이는 해당 총서를 전개하는 출판사의 색과 사명, 의지를 보여주면서도 무엇보다 기획자를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요즘과 같이 세세한 분야의 세세한 전문가들이 주목받는 시대에 각자의 색을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모습이 멋지고 또 흥미로웠다.

 

단행본으로 어떤 서사를 엮는다면 다소간 작가와 이야기의 역량에 좌우되는 경향이 있다. 대중의 소비와 트렌드에 휩쓸리기가 훨씬 쉬우며, 대중 또한 단권이 가지는 영향력을 크게 느끼지 못할 확률이 높다. 대신 한 권의 개성이 해낼 수 있는 가벼움과 신속함, 한 방이 있다. 그러니까 단행본이 각자도생이라면 총서는 모여야 산다는 느낌이라고 할까. 나무가 모여 숲이 되듯 거대한 이야기의 흐름을 위해서 한 권 한 권이 제 역할을 하고,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모여 뚜렷한 한 그림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익숙하게 보고 들었던 트렌드가 아니라 내가 몰랐던 세상의 다양한 시각을 넓혀주는 그야말로 ‘견문’의 역할을 하는 총서들이 무척 반가웠다. 당장 출판계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며 독자들에게 새로운 관심사와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으로 총서를 만들고 있었다. 그런 총서들이 더 많아지는 것이 출판계의 풍요와 직결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 또한 짧은 편집자 생활 동안 뜻하지 않게 총서를 만드는 부서에 있었다. 소위 ‘사장님의 사명’이라고 불리는 팀이었다. 출판사의 존속을 위해 팔리는 책들을 만들어야 하지만,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사회에 꼭 필요한 이야기를 펴내야 한다는 사명감을 실현하고자 만든 총서라고 했다. 그야말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을법한 작은 분야였지만, 누가 봐도 ‘누군가 해주면 참 좋을 이야기’였다. 편집자로서 총서를 만드는 경험은 참 귀했다. 시류에 휩쓸리거나 대중의 흥미를 기민하게 살피는 일보다 그 책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깊게 몰입하고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권의 단행본을 작업하는 것과 총서를 만드는 마음은 이상하게도 큰 차이가 있다. 총서는 단행본보다도 기획력이 중요한 만큼 편집자의 역량이 십분 드러나며, 디자인에 있어서도 단발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 깊고 넓은 사고가 필요하다. 총서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출판사들이 협업하는 모습 또한 총서의 훌륭한 면모다. 뜻을 세우면 동료가 생긴다는 말이 떠오른다. 작고 개성 있는 출판사들이 한 가지 총서를 위해 모인 모습은 가끔 어벤져스 같아 보이기도 한다. 나 또한 친구들과 의미 있는 작당을 할 때 가장 즐겁듯이, 그들이 모인 걸 보지도 않았는데 즐거운 기분이 든다. 당장은 어렵지만 의미 있고, 몹시 흥미로운 작업일 테다.

 

©타별(tabial)

필자는 이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총서가 무엇인지 안 기분이다. 앞으로 출판계의 흐름을 알고 싶을 때마다 총서를 찾아볼 생각이다. 세상엔 꼭 전해져야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것이 꼭 사람들의 관심사 안에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꿋꿋이 이야기해져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게 총서였다. 이토록 출판계의 내실을 다져주는 총서는 때로 몹시 고독한 일이 될 수도 있는데, 이번 전시를 통해 인식되고 수면 위로 드러난 총서들, 지형학의 한 점으로 표시된 총서들에게는 그 자체로 큰 힘과 응원이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간이기에 더욱 빛났던 훌륭한 전시였다. 선언 같고, 의지 같고, 명함 같으며, 영혼 같기도 한 총서를 손끝으로 훑으며 전시를 다시 돌아본다. 한 권 한 권 쌓여가는 것이 마치 이어지는 발걸음 같다. 한 번 내디딘 뒤에는 다음을 내디딜 힘도 생길 것만 같다. 어쩌면 당연하다. 어떤 이야기는 단 한 권으로 결코 마칠 수 없으니까. 여러 번 시도해도, 겨우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 세상에는 있다. 그것은 아주 크고 여리며, 귀한 이야기일 테다. 단 한 번의 계기로 모든 걸 바꿀 수 없다는 걸 아는 게, 꼭 삶 같지 않은가? 총서는 그 커다란 이야기의 둘레를 겸손하고 탄탄한 걸음으로 나아가며, 엮는 이와 읽는 이 모두를 더 넓고 단단하게 하고 있었다.

 

 

양다솔│글쓰기 소상공인. 에세이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유료 뉴스레터 ‘격일간 다솔’ 발행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