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2022년 PLATFORM P 웹진은 출판계의 크고 작은 흐름들을 들여다보는 특집을 매달 선보입니다. 11월 특집글은 지난 10월 28일부터 30일까지 열렸던 ‘UE14 - 서울아트북페어 2022’에 참가한 강민선 작가의 <A-1의 세계: UE14 - 서울아트북페어 2022 참가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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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긴장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꿈을 꾼다. 장르는 두말할 것 없이 하드 고어 공포 스릴러. 나이를 먹을수록 긴장과 스트레스에 약해지는 건지, 남은 시간을 두 배로 살기 위해 꿈까지 살뜰하게 꾸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혼자 책을 만들면서 증세가 심해졌다는 거다. 책이 인쇄되어 나오기 직전, 도서전이나 북페어 같은 큰 행사 참여를 앞둔 시점이면 어김없이 그런 꿈을 꾼다. 현실에선 겪기 어려운 극악 잔인한 꿈을 일정 기간 연속으로 꾸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국 이 모든 걸 혼자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가장 크겠지. 이런 꿈을 꾸는 것마저도 좋은 점은 있다. 늘 최악의 꿈을 꾸고 난 다음이라선지 현실은 꿈보단 나았다. 꿈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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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이었다. 언리미티드 에디션이 열리는 북서울미술관이 고스란히 꿈속에 나타났다. 희고 단단한 벽과 전시를 위해 임시로 세워진 가벽 사이사이로 참가자들의 부스가 빽빽하게 이어진 모습, 무수한 사람이 내 어깨와 팔뚝을 스치고 지나갈 때 느껴지는 촉감까지 모두 생생했다. 책을 사고 집에 가는 길에는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졌다. 이게 무슨 일이야! 이러다 책도 사람도 다 물에 잠기는 거 아니야? 코로나로 한동안 오프라인 북페어가 열리지 못하던 때였다. 이런 꿈을 꿀 정도로 그리웠단 말인가. 하도 괴이하고 강렬해서 눈을 뜨자마자 메모해두었고, 그걸로 짧은 소설을 썼다(유어마인드에서 만든 ‘밤에’ 시리즈 중 『아득한 밤에』가 그것이다). 3년 만에 열리는 오프라인 북페어 기간에는 다행히도 쾌청한 가을 날씨가 이어질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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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부스 사전 설치를 위해 오후에 북서울미술관으로 향했다.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처음 참가했던 2019년 이후 두 번째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과 2021년에는 온라인과 책 전시로만 열렸다. 그러고 보면 나는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뒤늦게 합류해 오프라인과 온라인 형태의 북페어를 모두 경험한 셈이다. 환경의 제약에 대처하는 유연함과, 제약을 비약의 발판으로 삼아버린 노련함까지. 짧은 기간에 이 행사와 사랑에 빠져버린 이유는 충분하다. 7호선 하계역에서 북서울미술관 가는 길은 3년 전과 변한 게 없었다. 가을의 절정을 여기서 만났다. 장식의 디테일은 달라졌지만 미술관 내부도 그대로였다. 고작 두 번째로 와 놓고 희한하게 고향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내 자리. 부스 번호 A-1. 행사장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곳이자 모든 부스 중의 첫 번째였다.
부스(booth)는 칸을 나누어놓은 작은 공간을 말한다. 하나의 부스는 하나의 출판사 혹은 프로젝트팀을 이룬 제작자들이 그동안 준비한 창작물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공간이며, 각각의 창작물에는 창작자들이 바라보는 세계가 담긴다. 언리미티드 에디션이라는 거대한 공간에는 190개의 세계가 담긴 부스가 존재한다. 뭔가 익숙한 구조인 것 같은데 부스를 버스(verse)로 바꿔 보자. 하나의 버스는 하나의 세계. 평소의 우리라면 결코 닿을 수 없는 각각의 세계를 타로카드 펼쳐 놓듯 차르르 펼쳐서 모아놓은 멀티 버스의 세계가 바로 언리미티드 에디션이다. 버스 사이사이를 점프하듯 거닐며 새로운 나를 만나기 위해 우리는 매년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자, 상상은 여기까지, 이제 현실을 이야기하자.
어째서 내가 A-1을 차지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지 않으면 있는지도 모르고 쓱 지나가기 쉬운 자리인 것만은 안다. 정문 바로 옆에 있어서 좀 추울 거라는 것도. 그거야 옷을 껴입으면 되고, 눈길을 사로잡기 위한 비장의 무기도 있었으니, 이번 북페어를 위해 만든 책 『어크로스 더 리버스』 속 다리 그림이었다. 한강 다리를 걸으면서 기록한 것을 책으로 만들기로 결심할 때부터 그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제대로 그려본 적이 없어서 어떤 작법으로 그려야 하는지 결정하는 데 애를 먹긴 했지만 한 가지 방법을 정하고 나자 나머지를 쉽게 그릴 수 있었다. 그 그림을 모아 시트지로 만들어 벽에 붙였다. 다른 189개의 부스와 비교하면 귀여운 학예회 수준이지만 나의 세계에선 이보다 획기적이고 감각적일 수 없는 시각효과였다.
Day 1
A-1은 공기가 제법 잘 통했다. 정문 밖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맡으며 수줍은 표정을 마스크 속에 숨긴 채 양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으고 서 있었다. 첫날 오픈 시간인 오후 1시에 맞춰 관람객이 입장했다. 들어오자마자 “와아!” 소리가 나면 나한테 하는 말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벽에 붙은 다리 그림을 한 번 보고, 테이블 앞에 가득 쌓아둔 『어크로스 더 리버스』를 한 번 보고는 A-1이 보여주고 싶은 세계를 눈치채버린 감 좋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가만히 행복했다. “다리 이야긴가?”하고 책을 펼쳐 들었다가 실망의 눈빛을 감추지 않은 채 도로 내려놓은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몇 번을 다시 와서 읽다가 끝내 사 가기도 했다. 그 순간부터 나한테만 보이는 끈으로 그 사람과 연결된 느낌이 든다.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참여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독립출판 제작자이자 1인 출판인에게 꼭 필요한 홍보와 판매 목적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1년에 단 사흘만이라도 혼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싶어서. 누군가와 연결된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나와 비슷한 존재가 여기 함께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피부로 느끼고 싶어서. 아무리 혼자 있는 게 편하고 좋아도 결국 이게 나다. 부인할 수 없는 사회적인 나. 내가 부스 앞에서 하는 일은 딱 하나다. 나를 읽어줄 한 사람을 기다리는 일.
Day 2
둘째 날이자 주말이 되었다. 지난주까지 불면증과 악몽에 시달렸던 게 맞나 싶은 정도로 아침 6시에 눈이 번쩍 떠졌다. 벌떡 일어나 샤워를 했다. 1년에 단 사흘, 활기찬 아침을 맞을 수 있다는 것도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참여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오픈 시간인 오전 10시의 한 시간 전에 내 자리에 도착했다. 테이블 위에 책을 쌓고 관람객을 기다렸다. 이틀째인데 여기, 이 자리, A-1에 벌써 정이 들어버렸다. 내일이면 끝나는데 이렇게 정이 들어서 어떡하니 참.
어제 처음 만난 제작자들과 눈을 맞추며 인사했다. 하루 사이 아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입고 메일만 주고받던 서점 사장님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고, 웃을 때 미소가 얼마나 따뜻한지도 알게 되었다. 지난밤 야식으로 뭘 먹었는지는 알지만 눈을 보며 대화해본 적은 없는 SNS 친구들도 만났다. 나는 이들을 바로 알아보았다. 실제 모습은 작은 핸드폰 화면 속에서 보던 것보다 선명했고 입체적이었고 환했고 예뻤다.
행사 전날부터 그 많은 사람 사이사이, 그 많은 부스 사이사이를 점프하듯 빠른 걸음으로 걷는 이로 님(UE 기획자)은 어디서든 눈에 띄었고 가장 자주 눈에 띄었는데 단지 키가 크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이어폰을 낀 채 누군가와 계속 교신하고 있었고, 그와 비슷한 포즈의 현장 진행 요원들이 주변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언리미티드 에디션이 14년이라는 시간 동안 존재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하나를 생각하고 있다. 2만 명 넘는 관람객이 아무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관람을 마칠 수 있었던 건 결코 당연한 게 아니었다는 걸 새삼 느낀다.
Day 3
소식을 들은 건 새벽 4시였다. 지금껏 꾸었던 어떤 악몽보다 더 무서운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다. 사고가 벌어진 곳 가까이 사는 친구와, 토요일에 행사장에 들렀던 친구, 혹시나 태어나 처음으로 핼러윈이라는 게 뭔지 궁금해서 가보았을지도 모를 것 같은 친구, 그리고 동생에게 연락했다. 안부가 몹시 궁금하지만 연락할 수 없게 된 사람은 생존 여부라도 확인하기 위해 SNS를 뒤졌다. 망원역을 출발한 6호선 전철이 녹사평, 이태원, 한강진역을 차례로 지나가는 동안에는 눈을 감았다. 행사 중에는 불안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부스 앞에서 책을 보는 사람들의 손과 얼굴을 슬쩍 보기도 했다. 밤새 괜찮았는지, 가까운 사람 모두 무사한지. 적어도 행사장 안에 모인 사람들은 그렇게 보였다. 그 사실에 안심했다가, 안심해도 되는지 의심하기를 반복하는 사이 시간이 흘렀다. 행사는 조용히 끝났다.
D+1
언리미티드 에디션이 끝나면 곧바로 신간 홍보와 판매를 위해 서점에 입고 메일을 보내곤 했다. 이번엔 그러지 못했다. 왜 이런 일이 또 벌어진 걸까. 한 번에 너무 많은 사람이 밤사이 사라졌다.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로 나아지는 것은 없고 어째서 안 좋은 일이 더 나쁜 형태로 반복되는 걸까. 역사는 누군가의 피를 먹고 자란다지만 이토록 허망한 죽음이 반드시 필요했을까. 나는 뭘 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받은 게 많다. 지금도 받고 있다. 누군가 두고 간 삶.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시간. 이런 것들을 생각했다. 언젠가 맞이할 나의 죽음은 어디에 쓰일까. 그건 알지 못해도 살아 있는 모든 순간에 나와 타인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만은 안다. 이것이 이번 언리미티드 에디션 기간에 가장 크게 느낀 것이다.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 Jr.)의 『제5도살장』에는 트랄파마도어라는 행성이 나온다. 그 행성의 시간은 여기처럼 묶여 있지 않아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 번에 볼 수 있고, 원하는 순간으로 눈을 돌릴 수도 있다. 거기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자리에선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과거에 잘 살아 있으므로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트랄파마도어인들에게 죽음이란 그 순간의 불행일 뿐 다른 많은 순간에는 괜찮은 것이다. 정말 어딘가에 그런 행성이 있었으면 좋겠다. 있을 거야. 거기선 지구도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먼 별에 불과하겠지. 우주는 무한하고, 상상하는 모든 것이 이미 거기 존재하고 있을 거란 희망이 현실의 고통을 이겨내게 한다. 떠나간 모두 다른 세계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기를. 거기서 우리 다시 만나면 밤새도록 같이 놀아요.
D+2
누군가를 몹시도 그리워하는 꿈을 꾸다 잠에서 깼다. 악몽만큼이나 익숙한 장르다. 앞으로 몇 번을 더 꾸어야 전부 해소될까. 꿈에서라도 닿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런 생각을 하며 모로 누운 채 핸드폰을 켰다. 메일함에 새로운 숫자 1이 찍혀 있었다. 받은 편지함에 들어간 뒤 숨을 멈추고 한참 동안 제목을 들여다보았다. 이것이 꿈이 아니라면 메일의 제목은 이랬다. ‘안녕하세요. 『어크로스 더 리버스』 잘 읽은 독자입니다.’
강민선│비정형 작업 공간이자 1인 출판사 ‘임시제본소’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instagram.com/kangmingel
본문의 모든 사진은 임효진 사진가가 촬영한 UE14의 공식 사진입니다.
UE14 http://unlimited-edition.org
사진 임효진 https://instagram.com/seoul_journ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