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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아카이브 [SPECIAL] 수많은 지금이 존재했던 곳: 도쿄아트북페어 2022 참가기
2022-11-16 / 서하나 / 일한 번역가 및 출판 편집자

[SPECIAL]

2022년 PLATFORM P 웹진은 출판계의 크고 작은 흐름들을 들여다보는 특집을 매달 선보입니다. 11월 특집글은 지난 10월 27일부터 30일까지 열렸던 ‘도쿄아트북페어 2022’에 참가한 서하나 번역가의 <수많은 지금이 존재했던 곳: 도쿄아트북페어 2022 참가기>입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오가는 갈매기처럼?

갈매기 자매.

코로나 팬데믹이 언제 끝날지 모르던 2021년 초, 일본인 친구와 서신 교환을 시작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오가는 갈매기처럼 서로의 일상을 한일 공동 병기의 편지로 공유하며 소소한 즐거움을 찾는다‘는 그럴듯한 구실은 나중에 덧붙였고, 실은 둘 다 일본 영화 <카모메 식당>을 좋아해 붙인 이름일 뿐이었다.

그렇게 프로젝트를 이어가던 작년 말, 이왕 시작한 활동이니 내년에는 도쿄아트북페어에 나가자고 결정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여기에 속할까? 북페어 참가는 처음이었고 뭣도 몰랐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결정이었다. 먼저 북페어 창작자들은 대부분 웹사이트를 운영한다는 사실을 알고 1년에 10만 원이면 이용할 수 있는 웹사이트를 구매했다. 그리고 교환편지에서 벗어나 서울과 도쿄에서 각자 좋아하는 곳을 소개하는 웹매거진을 만들기로 하고 매달 새로운 주제를 정해 글을 쌓아갔다. 초기에는 우리만의 속도로 느슨하게 하던 활동이 어느 순간 본업에 쏟을 시간을 야금야금 점령했다. 그리고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일주일 3회 이상 글을 올리는 폭주 기관차가 되어 있었다.

 

언제나 마감은 휘몰아치고 어김없이 문제는 발생하지

여름이 시작될 무렵, 도쿄아트북페어의 일정이 발표되었다. 일본인 친구와 줌으로 회의를 거듭하며 지금까지 쓴 글을 정리하고 내용을 추가해 A2 종이 한 장으로 시티 가이드와 같은 잡지를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활동 내용과 샘플 디자인을 마련해 도쿄아트북페어의 네 영역 가운데 독립출판물을 소개하는 ZINE’S MATE로 참가 신청서를 보냈다. 드디어 참가자 발표가 있었던 8월 어느 날, 찾아본 도쿄아트북페어 웹사이트에는 한글과 일본어로 ‘갈매기 자매 かもめ姉妹’라는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행사가 열리는 10월 말까지 남은 시간은 두 달 남짓. 디자인과 제작을 한국에서 진행해 발송한 뒤 도쿄에서도 준비가 필요했다. 그러니 그보다 짧은 한 달 반 만에 기획 및 원고 작성과 번역, 디자인, 인쇄, EMS 발송, 굿즈 제작을 다 끝내야 했다. 그런데 하필 이때 찾아온 코로나. 움직일 때마다 ‘으으으’ 하는 신음이 절로 튀어나오는 몽롱한 상태에서 세 개의 ZINE과 굿즈를 제작하며 정신없이 9월 한 달을 보냈다. 분명 나는 책을 만드는 일에, 마감이 몰아치는 일에 숙련되어 있는데도 이건 또 다른 차원의 휘몰아침이었다. 그나마 다른 작업이 없어서 다행(?)이었다면 다행. 시간은 촉박해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며 안심했다. 인쇄 후 입고된 ZINE의 바코드가 찍히지 않아 전체를 재인쇄하기 전까지는. 역시나 인생, 쉽게 굴러가지 않는다. 그 사이 일본은 굳게 닫았던 문을 열었고 3년 반 만의 일본행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행사가 열리기 일주일 전, 도쿄에 도착했다. 오랜만의 도쿄였지만 여행 따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느 날은 친구와 만나 잡지를 넣을 봉투를 고르고 스탬프를 찍고 포장했다. 그리고 또 어느 날은 일본의 카드 결제 시스템을 배우며 매출 기록 과정을 연습했다. 또 다른 날에는 공원에 가서 인스타에 올릴 잡지 사진을 찍고 우리에게 주어진 작은 테이블을 어떻게 꾸밀지 이리저리 궁리했다. 드디어 북페어 전날, 행사장인 도쿄도현대미술관으로 향했다. 반입 출입구를 지나 ZINE’S MATE 구역인 지하 2층으로 들어서자 한 테이블에 갈매기 자매라고 쓰인 종이가 놓여 있었다. 우리 진짜 도쿄아트북페어에 참여하는구나.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3년 만의 도쿄아트북페어, 창작자와 관람객의 열기로 폭발했던 나흘

도쿄아트북페어는 2009년 ZINE’S MATE라는 타이틀로 일본에서 가장 처음 시작된 북페어다. 2019년에 10회를 맞았지만, 그다음 해부터 코로나 팬데믹으로 제대로 열리지 못하고 있었다. 2020년에는 행사 취소, 2021년에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병행한 최소한의 개최. 그러니까 올해는 3년 만에 제대로 열리는 행사였다. 코로나 상황에 맞춰 매해 350팀 정도 선정하던 창작자는 200팀으로 줄고 관람객은 사전 예약을 통해 3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 내에 행사장을 둘러봐야 하는, 지금이기 때문에 경험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하루 열 권 팔리면 많이 팔리는 걸 거야. 일단 우리를 알리는 데 힘을 쏟자.”

“분명 한가할 테니 내년 활동 이야기나 하며 시간 보내지 뭐.”

나와 친구는 줄곧 이런 대화를 나누며 북페어를 준비했다. 누구의 취향도 아닌 우리의 취향으로 서울과 도쿄의 좋아하는 곳을 소개해왔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마니아적이고 로컬적이었으며 요즘 트렌드와도 동떨어져 있었다. 웹사이트와 SNS에서만 움직였기 때문에 누군가와 직접 소통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행사가 열리기 전까지 우리는 그저 재미있어서, 좋아서 하는 활동이 과연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받을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드디어 도쿄아트북페어 첫날. 오후 한 시부터 네 시까지 프레스 프리뷰가 이루어진 뒤 일반 관람객이 오후 다섯 시부터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관람객이 1층을 거쳐 지하 2층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어느새 행사장은 사람들로 북적북적. 팀명에 ‘자매’라고 붙어 있어서인지 진짜 자매냐고 물어보거나 일본 여성 개그 유닛 아사가야 자매 같다면서 우리에게 관심을 보여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에 신기해하며 첫날을 보냈다.

 

 

둘째 날, 이날부터 3일 동안은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오롯이 부스를 지켜야 한다. 본격적으로 행사가 시작되기 전, 잠깐 콧바람이라도 쐬자며 나간 내 눈앞에는 입장을 기다리는 줄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그렇게 3일 동안 입장 시간이 적힌 스티커를 붙인 사람들이 밀물과 썰물처럼 끊임없이 들어오고 나갔다. 그 덕분에 매일 아침 샀던 오니기리는 가방에서 꺼내지도 못했고, 피로회복 비타민 젤리와 초콜릿으로 연명해야 했다.

모든 행사를 마친 마지막 날, 돌아가는 차 안에서 갈매기 자매는 마치 하늘을 날아가는 진짜 갈매기처럼 꺄악꺄악 소리를 질렀다. 태블릿 속 매출 정산 기록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금액이 적혀 있었고 며칠 동안의 판매금을 담아둔 지갑에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지폐와 동전이 두둑하게 쌓여 있었다. 현금을 선호하는 일본인의 특징 덕분에 매출의 90퍼센트가 현금 결제로 이루어져 손으로 느껴지는 감촉이 현실감으로 이어졌다.

 

 

사실 나는 도쿄아트북페어의 분위기를 전하는 글을 부탁받았고 그 내용을 써야 했다. 하지만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고는 부스에서 떠나지 못했으니 다른 구역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국내를 비롯해 해외에서도 리소 인쇄에 관심이 높아서인지 창작자는 물론 행사에서도 리소 작품과 전시가 눈에 띄었고, 왠지 협찬사로 한 자리를 차지해야 할 것 같은 일본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가 일반 부스에서 멋진 인쇄물로 자신들을 알리는 모습에 감탄했으며, 갈매기 자매의 부스가 있던 열은 그래픽 작업이 많은 부스 틈에서 여성들로만 구성되어 읽을거리를 만드는 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당연히 모든 부스가 창작자의 열기와 관람객의 뜨거운 관심으로 마치 용암을 뿜어내는 화산처럼 끊임없이 폭발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목소리를 나누는 장, 북페어

북페어가 열리던 나흘 동안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한국과 일본 유닛으로, 서울과 도쿄의 작은 즐거움을 찾는 활동을 느슨하고 평화롭게 하고 있어요.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시작해 온라인으로만 소통해 만든 ZINE이에요.” 이런 소개에 웃으며 책자를 들여다보고 공감해주는 사람들과 만났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와 있는 거지. 매 순간이 신기했고 나중에는 더불어 감사했다. 

부스에는 정말 많은 분이 찾아주었다. 우리의 웹사이트와 인스타를 보고 찾아준 분들, 일부러 시간을 내어 방문해준 지인들, 행사장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분도 많았다. 도쿄 여행 중 우연히 북페어에 왔다가 책자의 한국어를 보고 인사를 건넨 분, 5월에 플랫폼 피에서 진행했던 번역 관련 강연에서 갈매기 자매를 알게 돼 여행 중에 일부러 찾아주신 분도 있었다. 코로나 중에 한국 드라마와 K-POP에 빠진 일본인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한국을 좋아하거나 한국어 공부를 시작한 분들이 앞으로 한국에 가고 싶다며 책자를 구입했다. 어떤 초로의 아저씨는 좋은 활동이니 멈추지 말고 계속해달라는 말을 건네며 책자를 들고 사라졌다. 

나흘 동안 우리는 조금씩 누군가에게 가 닿고 있었다. 갈매기 자매라는 한정된 세계에 갇혀 있다가 조금씩 날갯짓을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우리를 둘러싼 누군가와 가늘고 느슨한 연대로 목소리를 나누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왜 이 활동을 하고 있을까 자주 궁금했다. 그런데 작은 테이블을 둘러싸고 갈매기 자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이들을 만나며 어렴풋이 갈매기 자매가 무엇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지 방향이 보이는 듯했다.

 

도쿄아트북페어가 보여준 것

도쿄아트북페어를 통해 내가 본 것은 ‘지금’이었다. 멈춰 있던 일상이 움직이며 현 상황에 맞춘 지금의 방식이 있었고 한국을 바라보는 지금의 시선과 다른 나라가 보여주는 지금이 있었다. 그리고 오래 기다리며 움직여왔을 창작자의 지금도 함께. 그것들이 모여 조금 앞의 미래를 바라보고 한 발 딛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년에는 또 어떤 ‘지금’의 형태가 도쿄아트북페어에서 펼쳐질까? 그때도 갈매기 자매는 ZINE’S MATE가 되어 작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누군가와 만나고 있을까? 어쩌다 시작한 활동으로 어쩌다 참가하게 된 도쿄아트북페어는 다시 꿈꾸어 볼 수 있는 미래로 지금 또 눈앞에 있다.

 

 

서하나│책을 만들며 서울과 도쿄의 소소한 즐거움을 찾는 한일 프로젝트 '갈매기 자매'를 운영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나는 도레미』 『느긋하고 자유롭게 킨츠기 홈 클래스』 『당신의 B면은 무엇인가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