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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아카이브 [SPECIAL] 출판의 도구들, 그런데 형태가 없는
2022-12-21 / 조현익 / 그래픽 디자이너

[SPECIAL]

2022년 PLATFORM P 웹진은 출판계의 크고 작은 흐름들을 들여다보는 특집을 매달 선보입니다. 12월 특집글은 지난 11월 23일부터 25일까지 PLATFORM P에서 열린 특강 ‘Publish Publishing: 출판의 도구들’을 듣고 조현익 디자이너가 작성한 <출판의 도구들, 그런데 형태가 없는>입니다.

 

 

출판의 도구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원고지와 연필, 한컴오피스와 어도비 인디자인, 4×6전지 종이와 오프셋 인쇄기… 같은 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들은 책이라는 매체를 만드는 과정(글쓰기, 편집, 인쇄)의 도구일 따름이다. 사람이 어떤 작업물을 세상에 내놓으려면, 즉 출판하는 행동publishing을 하려면, 매체를 만드는 도구 말고도 출판 행위를 촉진하는 어떤 ‘무형의 도구’가 필요하겠다.

PLATFORM P가 2022년 11월에 진행한 특강 시리즈 〈Publish Publishing: 출판의 도구들〉은 출판하는 행동을 촉진하는 도구로서의 출판 플랫폼을 다뤘다. ‘출판·출판물이라고 흔히 불리는 것’의 경계에 놓인 행동·매체를 소개하고, 출판하는 행위를 다시 고찰하려는 시도였다. 이 글은 각 강연에서 중요하게 언급된 “출판의 도구”를 중심으로, 4회의 특강 내용을 다음처럼 재구성한다. 

  • 출판 생산자(작가, 편집자 등)와 독자 사이의 유대 관계.
  • 출판 생산자 본인과 협업자의 공동체 모임.
  • 출판 생산자의 기존 작업물과 그로부터 파생된 사회적 영향력.
  • 독자적인 출판 도구를 만들겠다는 꺾이지 않는 마음(?).

 

 

첫 번째 도구, 출판 생산자와 독자 사이의 유대 관계.
“출판, 제조업인가? 서비스업인가?”: 11/23, 신우승 (전기가오리)

전기가오리는 현대철학 논문을 선정하여 정기적으로 번역하고 구독자에게 전달한다. 따라서 전기가오리는 종이책·전자책 제조업으로서의 출판과 커뮤니티·번역 서비스업으로서의 출판을 동시에 고민한다. 특히 서비스업에 대한 고민 속에는 출판 생산자와 독자 사이의 유대 관계가 중요하게 다뤄진다. 

전기가오리는 철학을 배우려는 독자의 진입장벽을 낮추고, 독자가 지속적으로 유대감과 참여 의지를 가질 수 있게 노력한다. 자사 출판물을 교재로 하는 구독자 공부모임을 운영해서 정기적인 활동을 유도한다. 또 구독 최소가격을 낮게 유지하고, 구독자의 철학 질문에 성실히 답하며, 구독자 커뮤니티 안에서 ‘으쌰으쌰 공부하려는’ 기운을 불어넣는 일에 깊이 관여한다. 

다른 한편으로, 전기가오리는 잠재적으로 어떤 독자층과 관계를 맺을지 스스로 선택하려는 고민도 한다. 독자들은 전기가오리의 출판물을 보고 구독 여부를 결정한다. 따라서 전기가오리는 새로 발행할 출판물의 성격을 정할 때, 관계를 맺고 싶은 잠재 독자층의 배경, 관심사, 성격을 고민한다. 어떤 주제의 논문을 선택할지, 어떤 사고의 흐름을 따르는 논문을 선택할지, 논문 내용과 번역글의 난(이)도는 어떻게 설정할지 등등.

신우승은 ‘내가 나이가 들고 체력이 떨어져서 전기가오리의 사업을 점점 축소하더라도, 공부모임은 마지막까지 계속하고 싶다’고 강연 말미에 밝혔다. 출판 생산자와 독자 사이의 유대 관계는, 그의 출판 행동을 촉진하는 중요한 도구인 셈이다. 

 

두 번째 도구, 출판 생산자 본인과 협업자의 공동체 모임.
“줄, 탁 — 안에서 바깥으로, 그러나/그리고 또 어디로?”: 11/25, 기경란, 지다율 (출판공동체 편않)

‘출판공동체 편않’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기존 출판의 권위적, 퇴행적 관행에 의문을 갖고 새로운 장을 열어보자는 의도로 시작했습니다. 출판계에 산적한 질문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고 누구나 함께 고민하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 저희의 목표입니다.” 이 소개처럼, 편않은 출판계에서 보통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것들을 조명한다. 

특히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출판 생산자가 모인 편않의 공동체성 그 자체이다. 편않은 책의 판권면에 출판에 관여한 모든 사람들(작가, 기획편집인, 교정편집인, 제작/배포, 표지·내지 디자인, 인쇄업체 등)을 적어서 생산자의 기여도와 공동체성을 폭넓게 인정한다. 또 일반적인 북토크보다 공동체성을 더욱 강조한 모임을 정기적으로 연다. 신간이 나오면 필진과 편않 구성원과 독자가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 출판을 도모하는 “편않 파티”를 연다. 또 편않에 관심을 가진 누구나 참석해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편않의 동료가 될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리인 “열린 편집회의”를 월 1회 연다. 

흥미롭게도 편않뿐만 아니라 다른 강연자도, 생산자 공동체를 만들고 동료를 모으는 작업을 중요하게 언급했다. 신우승은 연구와 번역을 잘하는 젊은 학자들이 발굴되지 못한 채 철학 서적 출판계와 학계에서 소모되는 상황을 강조한다. 그는 뛰어난 대학원생을 직접 발굴해서 전기가오리 번역 작업 동료로 모으는 한편, 이들의 학업을 지원하는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한다. 뒤에 언급할 ‘새로운 질서 그 후’의 아티스트 3인은 같은 웹페이지 제작 수업을 수강하면서 만나게 되었는데, 수업을 통해 각자의 작업물과 ‘웹페이지를 직접 제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생각을 공유할 수 있었다. 이것은 공동체를 꾸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 뒤에 언급할 차우진 역시, (장기 수익의 원천이 될) 좋은 작업물을 꾸준히 출판하려면 창작자와 좋은 관계를 길게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오랜 시간을 써야 할 일이고, 시간이 아닌 다른 자원을 투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강조했다. 

다시 편않의 이야기로 넘어가서, 편않의 공동체성은 편않의 출판물에도 영향을 끼친다. 출판 생산자가 편않에서 털어놓는 고민 내용이 곧 출판물이 되기 때문이다. 편않이 생산한 첫 출판물인 무가지 〈편집자는 편집을 하지 않는다〉는 출판계 속 여러 직업군과 노동 분야(편집, 디자인, 비평, 서점 운영, ‘예비출판인’ 등)를 다룬다. 편않의 첫 단행본 시리즈인 〈우리의 자리〉는 글 쓰는 사람(기자)의 일과 자아를 탐구하는 내용으로, 현업 기자를 에세이 저자로 발굴해서 펴낸 책이다. 

이처럼 출판 생산자의 공동체를 만들고 운영하다 보면, 구성원들의 뜻에 맞는 작업물을 구상하고 출판하기에 이른다. 생산자 자신과 동료들이 곧 출판의 도구가 된 것이다. 

 

세 번째 도구, 출판 생산자의 기존 작업물과 그로부터 파생된 사회적 영향력.
“크리에이터 툴, 혹은 크리에이터로서의 출판인”: 11/23, 차우진 (TMI.FM)

차우진은 대중음악 산업의 변화를 되짚으며 출판(산업)의 새로운 도구를 상상하자고 제안한다. 그는 대중음악 산업과 출판 산업이 유사함에 주목한다. 대중음악 생산자는 일찍이 퍼블리싱 플랫폼의 격동을 겪었고, 퍼블리싱(악보·음원을 발매)의 개념도 공유한다. 게다가 창작 도구와 스트리밍 서비스가 발달하면서, 음악은 생산하기도 향유하기도 너무 쉬운 문화 콘텐츠가 되었다. 생산자 입장에서는 “음악이 일상이 되었는데 내가 돈을 더 벌기는커녕 음악의 가치가 급격히 떨어졌다.” 

미국의 ‘억만장자’ 뮤지션들이 돈을 버는 수입원을 분석하면, 음원과 콘서트 티켓으로 벌어들이는 수입보다 다른 비즈니스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더 많다. 이 비즈니스 모델은 광고나 방송·영화에 출연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콘서트 투어 또는 뮤지션 개인이 브랜드 파트너·스폰서를 얻는 것, 뮤지션이 방송·영화 제작 또는 자신의 브랜드를 내건 공산품 제작에 직접 참여하는 것, 자신의 옛 작업물을 영화 등에 사용할 권리를 판매하는 것, 스타트업에 투자해 경영에 관여하는 것 등이 있다. 이런 비즈니스 모델은, 뮤지션이 지금까지 음악 작업으로 획득한 사회적 영향력을 활용해서 각종 권리를 사고판다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뮤지션의 퍼블리싱은 이제 음악 활동에 머무르지 않는다. “음악의 가치가 떨어진” 탓에 음악 활동만으로는 이를 지속할 자본을 쌓기 어렵다. 대신 수년간 양질의 음악 활동을 해서 대중적 영향력과 다양한 권리(저작권 등)를 쌓고, 이를 수익화한다. 이렇게 벌어들인 자본을 써서 다시 양질의 음악 활동을 하는 퍼블리싱의 선순환이 만들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뮤지션의 영향력이 그저 (음원 판매량이나 소셜미디어 팔로어 같은) 많이 노출되고 유명한 정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작업물과 활동을 근거로, 뮤지션이 특정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비즈니스 파트너에게 설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 선순환을 만드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음악 활동을 오랫동안 꾸준히 하는 것이다. 

같은 내용을 출판에 적용하면, 이제 출판 행위는 글을 쓰고 책을 판매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글과 책을 계속 축적하고, 그렇게 쌓은 대중적 영향력과 다양한 권리를 수익화하며, 이렇게 벌어들인 자본을 써서 다시 글과 책을 생산하는 선순환을 만들 수 있겠다. 이런 선순환을 만드는 예시로, 차우진은 ‘블러썸 크리에이티브’(이하 ‘블러썸’)를 소개했다. 블러썸은 문학·그림책 작가를 주 고객으로 하는 “크리에이터 에이전시”다. 블러썸은 스케줄 관리나 언론 대응 같은 일반적인 매니지먼트 사업뿐만 아니라, “크리에이터의 활동과 작품의 원천 판권 등을 널리 알려 창작자의 권익을 확대”하는 작업을 한다. 소속 작가 원작의 2차 저작권 사업(영상·웹툰 창작, 해외 출판 등)을 기획하거나, 통상적인 문학의 범주를 벗어난 창작 작업(예를 들어, 신생 아이돌 그룹의 세계관 컨셉 구상)에 작가가 참여할 기회를 발굴하는 것이 그 예시이다.

 

마지막 도구, 독자적인 출판 도구를 만들겠다는 꺾이지 않는 마음(?).
“51개의 웹사이트”: 11/24, 윤충근, 이소현, 이지수 (새로운 질서 그 후)

미술·디자인 작업을 하던 세 작가, 윤충근, 이소현, 이지수가 웹페이지 제작 수업 “새로운 질서”를 수강하면서 만났고, 그들이 만든 작업 공동체가 ‘새로운 질서 그 후’이다. 이날 강연에서 세 작가는 “새로운 질서”를 수강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만든 웹페이지 작업물 51개를 소개했다. 

새로운 질서 그 후에게 웹페이지란, 종이책이나 CD 같은 다양한 매체 중 하나일 따름이다. 실제로 웹페이지와 종이책은 속성이 비슷해서 관련된 어휘가 여럿 겹친다(publishing, page, index, bookmark 등). 그렇다면 종이책의 독립출판처럼, 대형 소셜미디어와 웹페이지 제작 플랫폼으로부터 독립해서 자기가 직접 원하는 웹페이지를 만드는 건 어떨까? 새로운 질서 그 후는 자신의 웹페이지를 모래로 만드는 두꺼비집 같다고 설명한다. “투박하고 매끄럽지 않게 작동할 수는 있으나, 내가 말하려는 콘텐츠를 가장 적합한 형태의 매체로 보여줄 수 있다.” 이로써 대형 서비스의 획일적인 UI·UX·생활양식으로부터 독립하고, 개인정보 독점과 감시로부터 독립하며, 친숙한 정보와 관점만 제공 받는 극단주의의 배경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

이렇게 (웹페이지) 출판 도구를 독자적으로 만들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뭔가 만들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온갖 종류의 (웹페이지) 출판을 바로 실행하게 된다. 제작에 큰돈이 들지 않으므로 지극히 사적인 출판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이번 강연에서 이소현은 자신에게 언제든지 접속할 수 있는 Zoom 링크로 연결되는 웹페이지를, 이지수는 자기 작업에 자주 쓰이는 문장부호를 바로 복사해서 쓸 수 있도록 문장부호만 모아놓은 웹페이지를 소개했다. 

그뿐만 아니다. 이렇게 쌓인 출판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질서 그 후는 웹 환경의 본질을 꿰뚫는 예술작업, 개인용 자체 제작 소셜미디어, 시각장애인을 위해 이미지의 대체 텍스트를 모은 ‘대체 미술관’ 등의 아주 유의미한 출판 활동도 할 수 있었다.

 

 

조현익│스튜디오 하프-보틀의 그래픽 디자이너 겸 대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시각화하여 전달하는 작업을 즐긴다. 책을 매개체로 쓰는 작업이 점점 많아지더니, 출판도 겸업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