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IC]
2023년 PLATFORM P 웹진에서는 포도밭출판사의 최진규 대표가 소규모 출판의 과정을 살피고 안내합니다. 2편은 <기획을 위한 지도 제작술>입니다.
이번에는 ‘기획’을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기획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일을 꾀하여 계획함’이라고 나옵니다. 기(企)자가 ‘꾀하다’ ‘발돋움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계획’의 뜻을 찾아보면 ‘앞으로 할 일의 절차, 방법, 규모 따위를 미리 헤아려 작정함. 또는 그 내용’이라고 나옵니다. 이 뜻풀이를 통해 새삼 이러한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기획’이라는 말뜻에 충족하려면, 꾀하는 것에서 그치면 안 되고 꾀한 것을 어떻게 해낼지 헤아리고 작정하고 실행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때 헤아리는 과정에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가보지 않은 길 앞에서 조사하고 탐색하는 수행이 필요하겠지요. 기획과 계획을 위해서는 꼼꼼한 ‘조사’가 필수입니다.
조사와 탐색은 마침내 지도를 만들 수 있게 해줍니다. 지도란 일단은 목적지에 틀림없이 도착하도록 돕는 물건인데요, 의외로 방랑에도 도움이 되는 물건입니다. 그러니 길에 나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도를 마련해야 하는 법. 어떠한 여정을 고려하고 있든 지도가 있으면 좋습니다. 하지만 이제 막 시작하는 우리 가방 안에는 아직 지도가 없지요. 그러니 출발 전에 지도를 하나 그려야 합니다. 남이 준 지도보다 쓸모 있는 것은 내가 공들여 그린 지도이고요.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 ‘지도 제작술’을 알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지도 제작술
기획의 영역에 발을 내딛기 전에 앞으로 수시로 펼쳐서 확인할 자신만의 지도를 그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 지도 제작술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지도 제작술이라고 하니 쓸데없이 거창해 보이는데 사실 말하고 싶은 바는 단순합니다. 좋은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여행에서 바라는 게 무언지를 잘 알고, 내가 돌아다니는 여행지가 어떠한 땅인지 제대로 파악해야겠지요. 기획도 비슷합니다. 내 욕망을 잘 알고 해당 분야를 잘 파악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런 일을 돕는 유용한 습관 혹은 태도가 있습니다.
1) ‘큰 거 한 방’은 금물
일단 피해야 할 사고방식이 하나 있습니다. ‘큰 거 한 방’이라는 생각입니다. 떠오르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출판사를 설립하고 운영을 막 시작했을 때 한 선배 출판인이 해주신 이야기인데요, 제가 좋아하는 선배가 해준 이야기라 그런지 오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저도 그랬지만 그 선배도 출판사를 설립한 초기에 헷갈리고 모르는 게 하도 많아서 주변 창업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모르는 걸 자주 물었다고 해요. 그때 어느 분이 그 선배에게 이런 조언을 했다고 합니다. “세금이니 제작이니 유통이니 죄다 걱정이지? 근데 고민을 한 방에 없애는 방법이 있다는 거 알아? 큰 거 하나만 터뜨리면 돼!”
사업을 사업답게 운영하는 요령을 묻는 새내기에게 자잘한 고민은 그만하고 ‘큰 거 한 방’ 터뜨릴 궁리를 최우선으로 하라고 조언한 것이지요. 물론 정말 그럴 수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하나면 자잘한 고민은 다 해결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출판사를 시작한 이유가 ‘베스트셀러 하나’가 아니라면 여전히 큰 그림과 실행안들이 필요합니다. 큰 그림과 나의 좌표와 주요 실행안들을 기록한 종이. 저는 그런 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라고 생각합니다.
2) 새의 눈으로
지도 제작을 위해서는 먼저 하늘 높이에서 영토 전체를 조망해 봐야 합니다. 새의 시선에서 우리가 속한 땅, 즉 출판의 지형을 바라봅니다. 출판의 지형은 ‘출판 분야’라는 말로 구획돼 있습니다.
이렇게 높은 시선에서 조망하는 일은 도서관 혹은 오프라인 서점을 거닐면서, 아니면 온라인 서점의 웹페이지를 보면서도 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책 한 권 한 권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출판 분야들부터 살펴봅니다. 출판에는 분야가 있지요. 크게는 어린이 / 인문 / 역사 / 사회과학 / 자연과학 / 문학 / 자기계발 / 예술 / 건강 / 취미 등의 분야가 눈에 띕니다. 가만 보면 이 분야들이 다시 나뉩니다. 문학 분야의 경우 시 / 소설 / 에세이 / 희곡 등으로 나뉩니다. 이는 재차 나뉠 수도 있습니다. 소설에서는 한국소설 / 영미소설 / 유럽소설 / 일본소설 등처럼 언어별로 나뉘기도 하고, SF / 판타지 / 로맨스 / 공포 등처럼 장르별로 나뉘기도 합니다. 이처럼 출판에는 분야가 존재하고 이 분야는 이미 세세하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도서관의 서가 정리를 살펴보거나 오프라인 서점의 매대 구분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온라인 서점의 카테고리로도 확인할 수 있지요. 이처럼 출판 분야부터 꼼꼼히 봐야 하는 이유는, 내가 주로 뛰놀 놀이터가 어딘지 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출판 분야는 세세한 차원에서 정할수록 좋습니다. 두루뭉술하게 ‘문학’이라고 정하지 말고, ‘한국 작가의 SF 소설’ 혹은 ‘동물권 주제 에세이’ 혹은 ‘기후변화 다룬 자연과학’처럼 세밀하게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세밀한 출판 분야들을 다수 선택해 나가면서 분야가 폭넓게 확장돼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3) 두더지의 손으로
앞에서 새의 시선으로 영토를 살펴봤다면, 이번에는 땅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이제 땅의 표면과 땅속까지 탐색할 차례입니다. 출판 분야를 정하는 것은 내가 활동할 영역을 아는 일의 시작이지요. 분야를 정한 뒤에는 그 분야에서 어떤 출판사들이 활약하는지를 살펴봅니다. 그 출판사들은 경쟁자이자 협력자가 될 곳들이니 잘 알아둬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좋은 경쟁자는 적이 아니라 좋은 협력자나 마찬가지라고요. 그들이 앞서 하는 일들을 잘 배워야 합니다. 먼저 이 터전에서 일해온 사람 혹은 회사의 방식을 배우는 것은 새내기에게 너무나 중요한 과정입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정말이지 다양한 것을 살필 수 있습니다. 몇 가지만 들어볼까요
해당 회사의 운영 방식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판권을 보면 발행인 포함 직원 구성을 알 수 있지요. 몇 명의 노동자가 어떠한 업무 분담으로 일하는지 대략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확인한 뒤에는 해당 출판사가 얼마의 간격으로 책을 펴내는지도 조사해 봅니다. 일 년에 몇 종을 내는지, 얼마의 시간 간격으로 내는지 따져봅니다. 일하는 사람 수에 비해 책이 많이 나온다면 외주 시스템을 활용한다고 짐작할 수 있겠지요. 온라인 서점에 가서 그 출판사 책들의 세일즈포인트도 알아봅니다. 세일즈포인트가 판매 성과를 정확히 반영하는 자료는 아니지만 이것으로 시장 반응을 대략 참고할 수는 있습니다. 특히 시장 반응이 좋았던 책들의 경우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지요. 세일즈포인트가 낮은 책들도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 출판사들은 좋은 판매 성과를 예상할 수 없음에도, 그걸 알면서도 책을 만들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책들이 출판사의 지향이나 성격을 보여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책이라고 여겨지면 더욱 꼼꼼히 살펴봅니다. 이는 재밌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이 출판사는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이런 책을 만들고 싶구나, 그러면서 손해를 메우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벌였구나, 하는 걸 알아보는 일도 가능합니다.
회사마다 디자인의 경향이 존재합니다. 표지의 모습을 쭉 모아서 살펴보면 그 회사가 익숙한 느낌을 추구하는지, 낯설고 새로운 느낌을 추구하는지, 장난스런 느낌을 좋아하는지, 어려워 보일지라도 고급스러운 느낌을 좋아하는지 등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스타일이 섞여 있더라도 어떠한 경향이 발견될 수밖에 없지요. 디자인의 경향 역시 주요한 출판 전략 중의 하나입니다. 출판사마다 어떤 디자인 경향을 만들어 나가는지를 주의 깊게 보면서 자신은 어떤 전략을 취할지, 어떤 디자인 경향을 추구할지 고민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야기할 마지막 내용일 것 같습니다. 두더지의 자세로 해야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바로 저자와 역자 풀(Pool)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토를 찾았다면 다음으로는 그곳에서 누가 의미 있는 활동을 하는지 알아야겠지요. 관심 출판 분야를 조사하고 해당 분야 출판사들의 출간 목록을 탐색하는 일을 통해 우리는 반드시 관심 저자 목록을 만들어야 합니다. 관심 저자의 기준은 저마다 다를 수 있겠습니다. 일단 해당 분야의 베스트셀러 저자가 관심 저자 물망에 오를 가능성이 크겠지요. 하지만 베스트셀러 저자의 책은 식상할 가능성도 큰 법이고 그러한 기획은 수월하게 이뤄질 리가 없습니다. 다양한 기준을 가지는 편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나의 관심 분야에서 읽고 싶은 책을 펴내는 저자, 읽어야 하는 책을 쓰는 저자, 이런 기준에 맞는 저자라면 반드시 관심 저자 목록에 이름을 올려야겠지요.
관심 저자 목록을 만드는 일은 정말 중요합니다. 저희가 이 땅에서 할 일이란 결국 그들의 활동지를 자꾸 찾아가고, 이야기 나누고, 집필을 도모하고, 그 결과로 책을 만드는 일이니까요. 목록을 만들었다면 이제부터는 그들의 책을 찾아 읽습니다. 관심 저자가 게시하는 글을 구독하고, 할 수 있다면 그의 SNS에도 찾아가 봅니다. 그의 관심사를 알아내고, 활동들을 꾸준히 ‘팔로우’하고, 그러면서 그 저자와 내가 무엇을 같이 할 수 있을지를 자주 상상해 봅니다.
해외 저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인터넷에 활동상이 남는 일이 많지요. 여러 방법으로 그의 활동을 추적(?)합니다. 아마존(Amazon) 서점에서 저자를 검색해 신간 알림을 걸어놓고, 굿리즈(Goodreads) 등에서 서평을 찾아 읽습니다. 이런 조사를 하다 보면 내가 주목하는 관심 저자와 관련한 인물로 누가 자주 언급되는지, 그를 자주 인용하는 다른 전문가는 누구인지 등을 새롭게 알게 됩니다. 그럼 이 역시 목록에 정리하도록 합니다. 그러면서 자꾸 상상을 합니다. 그와 내가 무얼 같이 할 수 있을지.
저도 당연히 관심 저자 목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래 작성해 온 긴 목록의 첫 줄에 이름을 쓴 저자는 인류학자인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입니다. 그의 책 『가치 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이라는 책을 읽고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고, 제가 좋아하는 몇몇 필자가 그를 자주 언급하는 것을 보면서 관심을 키웠지요. 그의 책들을 빠짐없이 찾아 읽으면서 그의 책을 만드는 일을 수시로 상상했습니다. 그의 책 중에 어떤 책부터 번역하면 좋을지, 번역은 누가 하면 좋을지, 해제가 필요한지, 추천사는 누구에게 부탁할지, 그런 것들을 자꾸 생각했는데 그게 결국은 ‘기획’이었습니다. 마침내 2016년에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이라는 책을 번역해서 펴냈습니다. 이 책 출간이 발판이 되어 이후에 정치학자 하승우 선생과 역사학자 후지이 다케시 선생의 책을 만드는 기회가 생기기도 했고,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말하는 아나키즘에 관심을 가진 한국의 여러 활동가 및 연구자들과 사귀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다시 후속 기획으로, 또 생각지도 못한 인연들로 이어졌고요. 그래서 2020년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무척 슬펐습니다. 당시 그레이버와 교분이 있는 활동가들이 멋진 장례식 축제를 준비했는데 뜻밖에도 제게도 연락이 왔습니다. 그레이버에게 편지를 쓰자는 제안이었지요. 처음에는 짧은 인사를 남길 생각으로 무심히 제안을 수락했는데, 막상 편지를 시작하니 너무나 많은 기억과 이야기들이 제 안에서 터져 나와서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를 지켜보며, 기획을 고민하는 일을 빌미로 그를 생각하며 지낸 시간이 그만큼 길었던 탓이었지요.
포도밭출판사는 지금도 인류학 책 출간에 큰 관심을 두고 있는데요, 이런 걸 보면 여전히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영향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십여 년 전부터 시간 순으로 누적해서 적어온 관심 저자 목록에서 1번에 있는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영향력이 아직도 이정도인 걸 보면, 관심 저자 목록이 기획에 미치는 영향은 정말 크다고 할 수 있지요.
지금까지 기획을 위한 지도 제작술을 이야기했습니다. 기획 자체를 이야기하는 데 이르지 못하고 기획에 앞서 알아둘 ‘조사 방법론’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벌써 분량이 훌쩍 넘고 말았습니다. 다음 연재의 주제는 ‘편집’인데요, 이번 글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자연스레 연결하면서 편집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최진규│충북 옥천의 소규모 출판사인 포도밭출판사에서 책 만드는 일을 한다. 북디자이너로도 일한다. 학교에서 편집과 디자인을 강의한다. 책방무사 멤버십이다. 어떤출판연구회 연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