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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아카이브 [BASIC] 책의 내면을 파악해 외면으로 구현하기
2023-07-11 / 최진규 / 포도밭출판사 대표

[BASIC]
2023년 PLATFORM P 웹진에서는 포도밭출판사의 최진규 대표가 소규모 출판의 과정을 살피고 안내합니다. 4편은 <책의 내면을 파악해 외면으로 구현하기>입니다. 

책의 내면을 파악해 외면으로 구현하기

지난 연재 글인 ‘편집’ 편에서 저는 ‘관점의 교환’을 말하면서, 편집자는 저자와 독자 사이에서 관점의 교환을 수행한다고 썼습니다. 그러면서 “이는 ‘디자인’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적었지요. 이번 편에서는 그 이야기를 이어나가려고 합니다.

저는 디자이너가 하는 일의 핵심도 관점들을 교환하는 주체가 되는 일, 관점들이 교환되는 장소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관점 교환의 대상에 있어서는 편집자와 차이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편집자가 주로 저자 관점과 독자 관점 사이를 매개한다면 디자이너는 책의 내면의 관점과 외면의 관점 사이를 매개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면과 외면

내면 관점과 외면 관점이란 말이 무얼 뜻하고자 하는지 잠깐 이야기하고 지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내면 관점은 원고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관점을 말합니다. 즉 원고의 내용이지요. 이 책이 말하고 싶은 건 무엇인가, 이 책은 누구에게 말하고 싶어 하는가, 이 책은 왜 이걸 말하고 싶어 하는가. 이런 것들을 고민하여 파악하게 되는 것이 내면 관점입니다. 이 관점은 텍스트로부터 얻어집니다.

외면 관점은 책의 외모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관한 관점을 말합니다. 이 책은 어떻게 보이면 좋을 것인가, 이 책은 어떤 인상을 가지는 것이 좋을 것인가, 이 책은 누구의 시선에 의해 어떤 물건으로 여겨지면 좋을 것인가, 이 책은 헐렁하고 만만해 보이고 싶은가, 아니면 철저하고 단단해 보이고 싶은가, 이 책은 어떤 두께를 가지면 좋을 것인가, 이 책은 어느 정도의 무게면 좋을 것인가. 이런 것들을 고민함으로써 해당 책의 외면 관점을 파악할 수 있겠지요. 내면 관점이 텍스트에서 얻어진다면 외면 관점은 비주얼로 구현되지요.

한편 내면과 외면을 이렇게 구분하는 일이 무척 억지스럽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람도 내면이 있고 외면이 있다지만, 사실 내면이든 외면이든 따로 분리된 게 아니라 하나라고 볼 수도 있으니까요. 내면이 없으면 외면이 없고 외면이 없으면 내면이 없으니 둘은 하나인 것이지요. 책의 내면과 외면도 그렇게 하나로 봐야 맞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책을 만드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둘을 분리하여 인지하는 과정도 필요해 보입니다. 분리하여 인지하되 두 관점을 다시 하나로 연결시키는 역할이 디자이너에게 주어진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관점이 합쳐질 때 이러한 연결 질문이 생겨나지요. 이 책은 무얼 말하고 싶은가, 그리고 그 이야기는 어떠한 외견으로 드러나면 좋을까.    

 

다수와 관점 교환하는 현장 디자이너의 갈등

앞서 ‘책의 내면과 외면을 매개하는 디자이너’에 대해 썼는데요, 현장의 디자이너는 저러한 차원뿐만이 아니라 훨씬 다양한 관점 사이를 매개합니다. 다양한 관점을 매개한다는 것은 다양한 갈등에 처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디자이너는 작업물의 외면의 구현하는 담당자로서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한 자기 관점을 가지고 있지만, 작업물의 내면을 담당하는 다른 주체(=작가), 그리고 작업물의 내외면 전반을 관리 감독하는 주체(=클라이언트)가 존재하며 그들과 필연적으로 협업해야 하는 운명입니다. 그러니 현장 디자이너는 항상 다수와 관점 교환을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갈등에 처하곤 합니다.

이러한 현실을 꽤 실감나게 보여주는 자료(?)들이 있습니다. 언젠가 멍하니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본 웹페이지들인데요, 현장 디자이너가 처하는 현실과 갈등을 무척 잘 소개하는 자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래 자료들이 꼭 ‘책 디자인’과 관련된 내용만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는 아쉬움이 있지만 여러 시사점이 있으니 소개해보겠습니다.

 

1) ‘그래픽 디자이너에게 부탁하면 안 되는 이유’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 분들도 지금 검색창에 ‘그래픽 디자이너에게 부탁하면 안 되는 이유’라고 검색해서 해당 웹페이지를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섀논’과 ‘데이비드’가 주고받는 메일이 그 내용이에요. 둘이 메일을 주고받는 발단이 된 사건은 섀논과 같이 살던 고양이 ‘미시’의 실종. 미시가 어느 날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자 섀논이 미시를 찾는 전단지를 만들어달라면서 디자이너 친구인 데이비드에게 부탁 메일을 보낸 것이지요. 부탁을 받은 데이비드는 흔쾌히 전단지를 만들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시를 찾는 전단지를 만들면 되는, 어찌 보면 간단한 일임에도 이 일은 기대와 달리 이상한 쪽으로 진행이 됩니다.

디자이너인 데이비드가 자꾸만 영화 포스터 같은 걸 만들어오는 게 가장 큰 문제. 게다가 클라이언트(는 아니지만 작업을 부탁한) 섀논이 요청한 적도 없는 내용을 데이비드가 임의로 전단지에 넣는 것도 문제입니다. 데이비드는 자꾸 왜 이럴까요. 비록 ‘전단지’라지만 데이비드는 창작자의 정체성과 표현에 대한 욕심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작업물의 외견을 가능한 근사하게, 더불어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완성하고 싶습니다.

결국 이 일화는 자기 고집과 욕심만 내세우며 말이 안 통하는 디자이너의 모습을 데이비드의 태도에 빗대 조롱하는 셈이지요. 실제로도 데이비드는 자기 관점에만 매몰돼 있는 모습이에요.

 

2) ‘우리나라 디자인이 구린 이유’

이번에 소개할 웹페이지는 ‘우리나라 디자인이 구린 이유’라고 검색하면 찾을 수 있습니다.

‘제64회 깐느 영화제 포스터’를 디자인 작업하는 설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예요. 첫 장면에 보이는 포스터 시안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검은 배경 속에서 역시 검은 옷을 입고 우아하게 앉아 있는 배우의 사진이 앉혀져 있고요. 아주 가는 획으로 적힌 64라는 숫자가 포스터의 검은 공간들을 구획하며 그려져 있습니다. 세련된 느낌을 추구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이 시안을 보고 클라이언트 쪽 담당자가 회신을 보내왔습니다.   

“실장님, 고생하셨고요. (...) 검정색이 칙칙하고 (...) 64 글자는 잘 안 보이고 (...) 마이너해요. (...) 아직 미완성 포스터 같습니다.”

저도 이런 식의 피드백을 많이 받아봐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습니다. 파랑색을 넣으면 파랑색이 울적해 보여서 안 된다고, 빨강색을 넣으면 빨강색이 뜨거워 보여서 안 된다고, 검정색을 넣으면 검정색이 칙칙해 보여서 안 된다고 피드백을 받는 것이죠. 그리고 글자는 굵고 선명하게 넣어야 ‘성의 있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 반대로 하면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흉을 듣지요.

이 말을 들은 ‘실장님’은 수정안을 작업해서 다시 보내옵니다. 칙칙한 검정 배경을 ‘화사한’ 핑크 배경으로 바꾸고, 배우의 다리는 길게 늘리고, 64 글자는 상당히 두꺼운 획으로 조정해서. 하지만 이번에도 피드백이 좋지는 않습니다.

“내부 논의 결과 반응이 안 좋네요. (...) 그냥 배우 얼굴 잘 보이게 해주시고요. 영화제 이름 잘 보이게 해주시고요. (...) 빠른 수정 부탁드립니다.”

결국 이 포스터는 클라이언트의 이런저런 요구를 수용하면서 두어 차례 수정을 더 거치게 됩니다. 그 결과 배우의 얼굴을 엄청 크게 크롭해 넣고, 포스터 하단에 영문으로 작게 적었던 ‘FESTIVAL DE CANNES’ 같은 표기는 한글로 ‘깐느영화제’라고 큼직하게 적는 것으로 고쳐지고, 여기에 심지어 “5월 당신의 감성을 충족시킬 명품 영화제가 온다”라는 문구까지 추가된 채로 ‘완성’됩니다.

앞선 두 가지 이야기 모두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디자이너가 현장에서 겪는 일들을 무척 실감하게 묘사한 셈이에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문제적인 면이 있는데, 디자이너의 일을 무척 협소하게 파악한다는 사실이 그렇습니다. 현장의 디자이너는 데이비드처럼 전적으로 자기의 고집대로만 작업할 수가 없습니다. 작업물의 용도를 저렇게 무시한 채 자신의 표현 욕심만을 채우는 작업을 할 수는 없습니다. 깐느 영화제 포스터를 작업한 실장님의 사례도 너무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가끔 클라이언트의 무리한 요구에 매우 지친 나머지 그냥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자동 반응 기계마냥 모든 수정사항을 원하는 대로 고칠 때가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렇게 최악이 되도록 ‘방치’하는 것은 너무 극단의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두 가지 이야기는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 간 소통의 난점, 난맥들을 잘 보여줍니다. 이는 좋은 디자인을 완성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라고 할 수 있지요. 마지막으로 좋은 디자인을 방해하는 요소를 한 가지 더 알아보겠습니다.

 

3)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현철×나몰라패밀리’ 편

유튜브에서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현철×나몰라패밀리’ 편이라고 한번 검색해보시겠어요? KDB대우증권의 광고영상인데요. 제가 보시길 바라는 내용은 영상 시작부터 35초까지의 내용입니다. 클라이언트가 광고 음악 제작을 발주하는 회의 장면. 이 회의장에서 주고받는 말들이 의미심장합니다.

“이번에 저희가 광고 음악을 만들고 싶은데요. (...) 아주 쉽게... (...) 요즘 대세인 힙합 스타일로... (...) 노래는 임원 분들께서 트로트를 좋아합니다... (...) 아 그리고 친근하게! (...) 세련되면서! (...) 신나게! (...) 느낌적인 느낌으로 (...) 광고인 듯 광고 아닌 광고 같은? (...) 마지막으로 강조하지만 정말 쉽게...”

클라이언트들이 회의에서 이런 말들을 쏟아냅니다. 그 결과, 놀랍게도 무척 흥이 나는 광고 음악이 성공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영상은 마무리가 됩니다. 그런데 저 회의 자체를 보면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작업을 발주할 때 사용하는 저 말들. 느낌적인 느낌의 말들. 저 말들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를 전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물론 스타일에 관해, 분위기에 관해, 작업물이 추구할 온도(?)에 관해 지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공허한 말들에 가깝습니다. 게다가 중구난방이지요.

그럼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좋을까요. 제 생각에 작업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보다도 서로의 관점을 교환하기 위한 이야기를 충실하게 나누는 것입니다. 협업하는 여러 주체들 간의 대화(때로는 디자이너 스스로 자신이 지닌 여러 관점들을 꺼내놓고 벌이는 독백까지 포함하여)를 할 수 있는 한 충실하게 나눠야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대화는 사실 아주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책의 내면과 외면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충분히 말하는 기본. 그런데 이 기본만큼 필수적이고 효과적인 건 없습니다. 이때 디자이너는 관점 교환을 통해 얻은 단서들로 책의 다면적인 정체를 파악한 후, 그 정체를 외면에 구현하는 일을 하지요. 내면 관점과 외면 관점을 오가며 이 작업을 완성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일입니다.

(다음 연재에 이어집니다)

 

최진규│충북 옥천의 소규모 출판사인 포도밭출판사에서 책 만드는 일을 한다. 북디자이너로도 일한다. 학교에서 편집과 디자인을 강의한다. 책방무사 멤버십이다. 어떤출판연구회 연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