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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아카이브 [INTERVIEW] 글 해석도 재미있게, 형태도 재미있게 : 오혜진이 말하는 책자 디자인
2023-08-08 / 조현익 / 스튜디오 하프-보틀 대표

PLATFORM P 웹진의 ‘INTERVIEW’ 시리즈는 세 명의 인터뷰어(글지마, 정유민, 조현익)가 각각 소규모 출판사, 편집자, 북디자이너를 만나 각자의 작업에 대해 들어보는 연재입니다. 이번 인터뷰는 조현익 스튜디오 하프-보틀 대표가 만난 오혜진 그래픽 디자이너 이야기입니다. 

 

글 해석도 재미있게, 형태도 재미있게 : 오혜진이 말하는 책자 디자인

그래픽 디자이너 오혜진은 9년째 오와이이(OYE)를 운영하면서 만든 디자인 작업물을 포트폴리오 웹페이지에 모아놓았다. 첫 화면에는 최근에 작업한 글자 중심의 포스터와 책 작업이 등장한다. ‘오혜진은 이런 작업을 해왔구나’ 라고 생각하며 아래로 계속 스크롤하면, 전혀 다른 성격의 과거 작업들(아이덴티티 로고, 전시 설치작업, 일러스트레이션 등)을 계속 발견하게 된다.
여러 매체를 다루는 오혜진에게 책이라는 매체는, 디자이너가 원고를 해석하고 그에 맞춰 재미있는 형태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의 매체이다. 그가 추구하는 역할과 디자인 스타일은 이 가능성에서 출발한다.  
 

오혜진의 배경과 타이포그라피의 맥락이 맞닿은 점

오혜진 저는 대학생 때 오진경 디자이너님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책 만드는 과정을 간단하게 배우기는 했어요. 하지만 저는 북디자인에 한정되기 보다는 이것저것 다양한 분야의 작업을 하다보니 출판사의 의뢰를 받은 적이 많지는 않아요. 미술관에서 의뢰받은 작업을 하면서 전시 도록을 간헐적으로 만들었는데, 여기서부터 꼬리물기 식으로 책 작업이 조금씩 들어오면서 요즘은 책 작업이 많아졌어요. 
제가 만화를 좋아하다보니 처음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에는 그림 그리는 걸 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학교에서 ‘타이포그라피’를 처음 알게 되었어요. 자기 맘대로 감각적으로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기술과 지식을 학습해야 하는 분야로서 타이포그라피에 재미를 느꼈어요. 
처음으로 책과 리플렛 작업을 맡았을 때에는, 제가 직접 그린 그림이 메인 요소가 되었고 타이포그라피는 정보를 읽기 좋게 표기하는 기능 정도로 활용했어요. 그런데 작업을 하다보면 내용이 다 다르잖아요? 거기에 마치 ‘내가 만든 것’이라고 표시하듯 내 그림을 항상 넣는 게 어느 순간 이상하게 느껴진 거예요. 그렇게 하지 않고 디자인한다는 것은 무엇일지 계속 탐색했죠. 
사람들이 디자인을 번역에 비유하곤 하잖아요.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시각 형태로 비유해서 보여줄까? 여기에 초점을 맞춰서 작업하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조현익 방금 말씀하신 대학교 학부에서의 타이포그라피 수업은 선생님들마다 교육방식과 다루는 내용이 다양한데요. 어떤 부분에서 재미를 느끼고 영향을 받으셨을까요?

오혜진 가독성이 좋은 상태란 무엇이고 전통적으로 좋은 글자란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 지식을 학습하는 게 재밌었어요. 선생님이 서체 리스트를 쫙 가져오면 학생들이 하나씩 골라서 어느 나라의 어떤 사람이 만들었고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리서치하게 했거든요. 그런 수업이 재미있었어요. 
“글자를 만드는 사람은 농부고, 그 (식)재료를 다루는 그래픽 디자이너는 요리사다.” 이런 말이 있어요. 서체의 맥락과 작업의 맥락이 맞닿도록 선택하는 것도 디자인의 영역에 포함된다는 것이죠. 같은 서체를 쓰더라도 어떤 변주를 주고 어떤 스토리텔링을 만들까? 이 지면과 판형 안에 어떻게 배치하고 어떻게 운영할까?
이런 시도는 온전히 감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기본을 배운 다음에 실험을 하는 거잖아요. 서체마다 그 형태가 어떤 맥락에서 파생되었는지 이야기가 있잖아요. 그런 것을 모르면 서체를 그저 형태로만 이해하게 돼요. 저도 (학교에서) 강의를 하는데, 서체를 단순히 “세리프네 산세리프네”, “모던하고 심플하다” “봤을 때 이게 예쁘다”며 선택하고 설명을 모호하게 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그건 말이 안 되는 거죠.

작업 사례 1: 다른 매체로부터 시각 언어의 실마리 찾기

조현익 책이 아닌 다른 매체의 디자인 작업을 같이 하다보면, 북디자인을 할 때에도 다른 매체(의 작업물)로부터 영향을 받기 마련인데요. 선생님의 작업 중에 그런 예시들이 궁금합니다.

오혜진 그것과 관련해서 제가 최근에 wrm(whatreallymatters)에서 했던 “릴레이 서재” 라는 전시의 내용이 그런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건 제가 여러 곳에서 말을 했다보니 그걸 다시 말씀드리기 보다는….

1. 『초과』 10호 : 더블링

오혜진 2021년에 만든 이 책은 저의 터닝 포인트 같은 작업이에요. “초과”는 한국어 시詩를 영어로 번역하는 모임인데요. 여러 번역가들이 하나의 시를 각자 번역하면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살펴본다고 해요. 시는 함축적이어서 단어를 선택하고 배열하고 문장 구조를 짜는 방법이 다양하다고 하더라고요.
이 작업 아이디어의 출발점은 제가 플랫폼L의 카럴 마르턴스 도록에서 찾은 「In/In」이라는 글인데, 루이 뤼티(Louis Lüthi)라는 작가가 간행물 오아서(OASE)의 100호를 기념하며 오아서를 읽는 경험을 쓴 글이에요. 오아서에는 네덜란드어와 영어가 나란히 실리는데, 다국어를 쓰는 사람은 두 언어의 한 쪽만 읽지 않고 왔다갔다 한다는 거에요. 교포들이 살던 곳 언어랑 한국어를 섞어 쓰는 것처럼, 언어를 인지하고 읽고 말하는 것이 하나의 언어로만 되는 게 아니라 섞인다는 거예요. 
“초과”의 번역가나 독자들도 두 언어를 오가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이 책 디자인에서도 정해진 판형 안에서 두 언어를 오가는 방법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작업을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초과』 10호는 열 번째 발행을 맞이하는 멤버들의 에세이로 채워졌는데요, 에세이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레이아웃을 짜 봤어요. 어떤 에세이는 보통 우리가 보듯 왼쪽에 국문, 오른쪽에 영문으로 가기도 하고. 또는 이렇게 글을 읽는 각도를 돌려서 한 페이지 내에 국문과 영문이 같이 가도록 하고. 어떤 에세이는 국문과 영문 글줄을 이렇게 섞기도 하고. 그리고 국문과 영문 두 단이 흐르는 방식을 이렇게 대각선으로 해보기도 하고. 이 작업 이후로, 시간적 여유가 있고 주제가 잘 맞는다면 이렇게 다른 텍스트를 참조해서 아이디어를 찾기 시작했어요.    

『초과』 10호 : 더블링

2. 『줄줄』 - 동시대 한국 시 선집(프랑스어판)

오혜진 『줄줄』은 『초과』를 보고 의뢰하셨던 작업이에요. 한국 젊은 시인들 11명의 시를 2-3개씩 모아서 영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그 나라에 배포해서 한국 시를 알리자는 프로젝트였어요. 4개 언어마다 다른 디자이너를 섭외했는데 저는 프랑스어를 맡았어요. 
그냥 관습적으로 하기보다는, 시라는 매체를 이해하고 작업하는 게 재밌겠다고 생각했어요. 시 쓰는 기술에 대한 책도 보고 시집도 찾아보다가, 그 때 찾은 책이 브루노 무나리(Bruno Munari)의 『예술로서의 디자인』 이었어요. 여기 보면, 시는 한 줄 한 줄 해석이 필요해서 되게 천천히 읽어야 한다. 빨리 읽는게 아니다. 그러면서 읽는 속도감에 영향을 끼쳤던 사례들을 얘기해요. 하나는 파울 클레라는 작가가 손으로 시를 쓰고 글자 사이사이에 전부 색깔을 칠했대요. 그러면 글을 가독성 좋게 쭉 읽지 못하고 눈에 자꾸 뭐가 걸리잖아요. 읽는 속도가 늦춰진다는 거죠. 또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즈』의 마지막 장 원고에는 구두점이 아예 없대요. 그러면 읽는 속도가,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지잖아요. 이런 식으로 글을 어떤 속도감으로 읽느냐에 초점을 맞춰서 작업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마침 이 책 제목이 『줄줄』이었는데, 그게 강성은 작가의 시 「세헤라자데」의 시구에서 따온 말이래요. ‘올이 풀린 스웨터처럼 줄줄 새는 이야기.’ 시에서도 글줄이 중요하니까 여러 의미를 포함할 수 있는 말이라서 제목으로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다면 이 책의 시각적 형태도 올이 줄줄 풀리는 느낌으로 만들면 어떨까? 그래서… 책을 읽을 때 보통은 페이지를 좌우로 넘기잖아요. 그런데 얘를 90도 돌려서 위아래로 넘기면 계속 스크롤 내리듯이 읽게 되잖아요. 이렇게 시가 흘러가게끔 큰 구조를 잡았고요. 또 메인 그래픽으로 기능하는 서체를, 스웨터의 실이 풀리는 모양으로 찾아봤어요. 표지 그래픽의 서체는 스크립튜얼 오픈패스(Scriptual OpenPath)라고 해서, 면으로 된 보통 서체와 다르게 선으로 된 서체거든요. 크기를 아무리 키워도 계속 (같은 두께의) 선의 형태가 유지되고, 또 마침 이렇게 손으로 쓴 필기체(Scriptual) 느낌이 마치 이어진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그래서 이 서체를 메인 그래픽으로 가져와서 표지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줄줄』 - 동시대 한국 시 선집 (프랑스어판)

조현익 지금 말씀해주신 과정이, 어떤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처음 만드는 것과 비슷하네요.

오혜진 저는 책을 만났을 때, 그냥 ‘보기 좋은 것’이 아니라 책 안에 담을 내용이 어떤 그래픽 구조 안에서 드러나야 하는지를 첫 번째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북디자이너 이르마 붐(Irma Boom)이 어느 토크에서 “북디자인은 아이디어다” 라고 말한 걸 봤어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보통 책 작업은 작업료를 ‘페이지당 단가’로 이야기하잖아요. 북디자인을 그냥 ‘지면 안에 글을 보기 좋게 나열한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그렇게 책정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물론 노동의 품은 다를 수 있죠. 하지만 기획하는 책이 10페이지든 1000페이지든, 서체를 선택하고 어떤 콘셉트과 구조 안에 넣을 거냐는 그 시각 언어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똑같은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❶ 오혜진은 작업 과정에서 참조한 텍스트를 수집하는 웹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작업 사례 2: 의미를 해석하고 극대화하는 디자인

오혜진 이 책들은… 쪽프레스에서 처음에 『디자인 정치학』을 의뢰했고, 이걸 텀블벅에 올릴 때 줄 굿즈로서 간단한 인쇄물을 만들자고 해서 제가 기획부터 같이 참여한 것이 『Designed Matter』 였어요. 그런데 진행하다보니 일이 커져서 아예 별개의 책이 되었어요.

조현익 저도 둘 다 따로 펀딩해서 선물받았던 기억이 있네요.

3-1. 『Designed Matter』

오혜진 『Designed Matter』는 그래픽 디자이너 10명에게 일정한 지면을 할당해서 직접 글쓰고 디자인까지 하도록 했어요. 그러다보니 책 내용에 앞서서 책의 구조를 먼저 정하고 시작했어요. 내지 스프레드(펼침면)를 다 쓸 수 있도록 책이 완전히 펴지는 노출 사철 제본을 하기로 했구요. 사철 제본을 하면 16페이지 단위❷로 묶어야 하니까 한 디자이너에게 16페이지씩 할당하도록 했어요. 
제 역할은 참여한 디자이너들의 작업 파일을 모아서 책으로 엮은 거였고, 그래서 제가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은 책의 실물 사양을 정하는 거였어요. 이 책의 독자 대부분은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일테니 그들에게 사양이나 물성을 보여주는 샘플로도 기능하면 재밌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본문 용지로 많이 쓰이는 국내지를 골라서 10명의 디자이너에게 각각 다르게 할당하고 그 종이가 무엇인지 책에 기록해뒀어요.

조현익 종이는 10명의 작가들이 각각 고르신 게 아니라, 혜진님이 직접 배치한 거군요.

오혜진 그래서 어떤 분은 “왜 나는 이 종이지?” 이럴 수도 있어요. (웃음) 
또 이 책을 기획한 쪽프레스에서, 참여자에 대한 소개글과 그 글에서 파생된 단어 인덱스를 넣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맨 앞에 16페이지 편집부를 따로 만들기로 했는데, 이 16페이지를 어떻게 해야 될까 생각했어요. 
여기 [책에 수록된] 이기준 선생님의 글에도 나오는데, 보통 사람들은 책 디자인이라는 말을 듣고 ‘글은 작가가 쓰고 그림은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리고 인쇄는 인쇄소가 했는데 그럼 너는 뭐 했니?’ 이런다는 거죠. 이 책은 드러나지 않는 존재(북디자이너)가 내용에서도 구조에서도 전면에 드러나잖아요. 마침 이 책의 구성 안에도, 페이지 번호라는 것이 있잖아요. 책에 존재하지만 항상 작은 요소로 쓰이고, 없으면 불편한데 그렇다고 부각되지도 않는. 이런 존재를 이 책의 주인공으로 가져오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앞표지의 이 커다란 ‘1’이 1페이지를 뜻하거든요. 그리고 (페이지를 넘기고 커다란 번호를 가리키며) 2페이지, 3페이지, 이렇게 넘어가요. 페이지 번호가 판면의 중심이 되잖아요. ‘1’이 1페이지인 거 혹시 아셨어요?

조현익 맨 마지막 페이지의 쪽번호 ‘176’을 보고 이것도 혹시 1페이지 아닐까 추측하긴 했어요. 물론 이 ‘176’은 [해당 페이지의 작가인] 신인아 디자이너의 작업이지만. 이렇게 내가 의도를 넣어서 만들었지만 아무도 알아채지 못 할 거라고 생각했던 부분을 누군가가 알아채면, 디자이너는 깜짝 놀라죠.    

❷내지를 4장(16페이지)씩 모아 종이 신문처럼 접어서 하나의 ‘대’를 만들고, 여러 ‘대’를 순서대로 모아서 실로 꿰맨다. 자세한 사철 제본 공정은 이 링크의 설명과 영상을 참조.

 

이기준, 김동신, 오혜진, 이지원, 박럭키, 금종각, 정동규, 정재완, 김의래, 신인아『Designed Matter』(고트, 2022)

3-2. 『디자인 정치학』

조현익 앞서 말씀하신 『디자인 정치학』 책에서도, 도서 시장의 일반적인 책과 비교해서 깜짝 놀랄 부분이 있어요. 표지를 넘기면 응당 나오는 면지❸, 속표지❹가 없어요. 제가 북디자인을 의뢰받아서 할 때, 이런 것을 제거하고 작업하면 많은 클라이언트들이 반드시 넣어달라고 하거나, 강경하게는 “이것이 없으면 책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기도 하거든요.

오혜진 사실 이건 제가 정했다기보다는 원서를 따른 건데요. 원서에서 이렇게 구성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어요. 이 책을 열면 나오는 서문이 도전적이거든요. “넌 선택받은 사람이다. 이 문장을 읽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글을 읽을 줄 아는 계층에 속했다는 뜻이니까.” 이렇게 심각한 문제제기를 확 던지는 느낌이예요. 
원서 디자이너의 의도를 제가 알 수는 없지만, 제게는 면지를 볼 틈도 없이 얼굴 보자마자 막 할 말을 하는 느낌으로 해석이 됐고. 그걸 계승하기 위해 면지를 넣지 말자고 했어요. 
저는 이런 선택의 이유를 설득력 있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은 형태적인 유희도 중요하지만 어쨌든 읽기 위한 목적이 있으니까, 읽는 사람 입장도 고려해서 디자인의 의도를 담아야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으니까요. 그저 “멋있어서”, “형태적 실험”이라면서 들이미는 것은 보는 입장에서도 설명하는 입장에서도 재미가 없고 별로일 것 같아요.     

뤼번 파터르,『디자인 정치학』(고트, 2022)

조현익 마침 선생님께서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계신데요, 북디자인을 처음 배울 때에는 자기 작업을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설명하기를 힘들어하곤 합니다. 그에 따라 작업에서의 시행착오도 많구요.

오혜진 이게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한 점인데요. 미술과 디자인의 가장 큰 차이는 ‘기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 경험으로는… 제가 책 작업을 처음 할 때는 본문을 항상 좌수(왼쪽 페이지)에서 시작했어요. 그게 컴퓨터 화면에서 볼 때는 이상한 줄 몰랐어요. 근데 나중에 만들어진 책을 읽을 때 뭔가 좀 답답한 걸 느꼈어요.
보통은 표제지가 들어가고 본문이 우수(오른쪽 페이지)에서 시작하잖아요. 표제지를 보고 잠깐 쉬고 본문으로 들어가는 이유도 있을테고, 본문이 쭉 나오다가 중간에 낱장의 표제지가 쑥 들어갔다는 개념으로 종이 한 장이 온전히 표제지가 될 때도 있고. 이렇게 본문 시작 위치에 따라 읽는 호흡이 다르다. 
그런데 이건 책을 실제로 볼 때 좌수를 읽고 우수를 읽고 종이를 한 장 넘긴다는 물성을 인지해야 알 수 있는 거예요. 인디자인을 써서 작업할 때 우리는 스프레드(펼침면)를 한 화면에 보고 위로 스크롤하면서 흘러가잖아요. 그래서 본문이 좌수에서 시작해도 이상한 것 같지 않아요. 화면에서 보면 절대 깨달을 수 없어서, 북디자인 경험이 얼마 안 되었을때 간과하는 큰 오류가 아닐까 싶었어요.

❸ 표지를 열어도 내지가 바로 나오지 않도록 표지와 내지 사이에 끼워넣는 색지.
❹ 내지의 첫 페이지에 마치 표지처럼 책 제목, 저자 등을 한 번 더 적은 것.

 

디자이너가 원고를 해석할 권한

조현익 북디자이너가 편집자 또는 작가와 협업하여 책이라는 작업물을 만들 때, 협업하는 과정에서 어떤 것을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궁금합니다. 우선 “10페이지든 1,000페이지든 가격은 비슷해야 한다.” (웃음)

오혜진 (웃음) 비슷해야 한다기보다는, 얇은 책이라고 결코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두꺼운 책이면 당연히 더 힘든 작업일 것이고.

조현익 제가 너무 속세스러운 말씀을 드렸네요.

오혜진 제가 최근(2023년)에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워크룸 프레스 김형진 실장님의 토크를 들었는데요. 공감되었던 말씀이 있어요. “원고는 저자의 것이지만 그것을 책으로 만드는 과정은 편집자와 디자이너의 것이다” 라는 말씀이었는데. 
디자이너와 편집자의 영역이 눈에 보이지 않다보니, 마치 ‘자기 취향, 자기가 생각하는 걸 대신 구현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아요. 특히 저는 읽기 쉽고 읽기 좋은 친절한 책이어야 한다면서, ’제목이 당연히 커야 하고 그 다음 작가 이름이 나오고 본문은 반드시 양끝 맞춤을 해야 한다’ 이렇게 관습적인 위계를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말을 정말 싫어해요.  
같은 원고라도 편집자와 디자이너마다 어떤 책의 꼴로 만들겠다는 관점이 다 다르고. 작가가 자기 생각을 글로 썼듯이 디자이너의 작업은 ‘이 디자이너가 자기 원고를 해석한 것을 시각 언어로 보여주는 것’임을 인지하고 협업하는 것이 좋겠어요.

조현익 지난 번 우유니 디자이너 인터뷰 때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그저 ‘글씨를 크게 키워달라’고 부탁하지 말고, ‘이 부분은 이런 점이 중요해서 부각이 되었으면 좋을 텐데, 그 방법을 같이 생각해봅시다.’ 이렇게 제안하는 것이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든다. 중요한 것은 메시지이고 메시지가 잘 드러나도록 디자인해야 하니까.”

오혜진 그것도 맞는 말이에요. 그래서 요즘에는 아예 기획 단계일 때, 작가들의 글이 아직 여기저기 툭툭 던져진 상태일 때부터 작업에 참여하는 걸 선호해요. 그렇게 하고 싶다고 어필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어느 정도 세팅이 된 상태에서 제가 합류하더라도, 디자인 면에서 뭔가 변화를 주는 게 장치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들면,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제안하는 편이에요. 저는 시안을 하나만 만드는 걸 선호하는데, 대신 그 시안에 대한 굉장히 상세한 문서를 만들어요. 왜 이 서체를 선택했는지, 판형은 어떤지, 이걸 어떤 시스템으로 만드려고 했고 그 안에서 어떻게 변주될 수 있는지 등등을 적은 문서죠. 그러면 설득이 되는 경우가 많고, 설령 다른 의견을 주더라도 의도는 납득하면서 큰 틀 안에서 의견을 나누려 하게 되죠.

 

“디자이너를 스스로 찾고, 그 디자이너를 믿어달라”

오혜진 …사실 그래서 (사전 질문지의) 마지막 질문이 좀 무서웠어요. “1인/독립출판을 막 시작하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 왜냐면 새로운 클라이언트와 작업하면서 다시 처음부터 이 과정을 맞추는 게 점점 무서워요. (웃음) 작업 해봤던 사람과 계속 같이 하고 싶고.

조현익 그런데 저는 이런 믿음이 있어요. 자기의 첫 원고를 출판하려는 분들은, 기존에 책 작업을 해 본 분들의 경험을 존중하고 서로 맞춰서 잘 해보자는 의지가 크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선생님의 입장을 더욱 터놓고 말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혜진 이게 어떤 오만일 수도 있어서 조심스럽긴 한데요. … 디자인 의뢰하기 전에 먼저, 자기가 믿을 만한 잘 맞는 디자이너를 찾아야 겠죠. 그냥 누가 추천해줬다고 의뢰했다가는 자기 생각과 다른 결과물을 받을 수 있으니까. 디자이너 과거 작업도 찾아보고 리서치해서 자기가 하려는 것과 잘 맞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기면, 나중에 협업에서 이견이 생겨도 서로 조율하면서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렇게 써 주세요. “디자이너를 스스로 직접 리서치하고, 최대한 믿어달라.” (웃음)

조현익 디자이너를 추천하거나 추천받을 때는 그 디자이너 포트폴리오를 같이 넘겨줘야 하겠군요. (웃음)

오혜진 그럴 수도 있구요. 이것만으로도 아주 많은 이야기를 드렸네요.

 

 

 

조현익 
그래픽 디자이너이면서 작가와 출판인 역할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 관점, 상상, 가치관을 시각화하여, 인상적인 사고와 감각을 전달하는 문화를 만듭니다. 포스터와 책자 편집디자인, 웹디자인, 저널리즘 컨텐츠 디자인, 로고와 굿즈를 비롯한 비주얼 아이덴티티에 관심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