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IC]
2023년 PLATFORM P 웹진에서는 포도밭출판사의 최진규 대표가 소규모 출판의 과정을 살피고 안내합니다. 5편은 <편집자가 디자인 발주할 때 알아야 할 것들>입니다.
편집자가 디자인 발주할 때 알아야 할 것들
저자가 원고를 보내오면 편집자는 검토 후 편집 회의를 열고, 1차 교정을 본 이후에는 디자이너를 선정해 디자인 발주 회의를 열지요. 대개 본문 디자인을 먼저 발주하고 그다음으로 표지 디자인을 발주합니다. 본문과 표지를 동시에 발주하는 일도 종종 있고요. 저는 이 디자인 발주 회의가 언제나 무척 긴장되면서도 설레더라고요. 디자인 발주 회의 전이라면 원고를 마주할 때 아무래도 최종 물성을 예감하지 못한 채로 마주하지요. 그러다가 디자인 발주 회의 시점부터 비로소 물성을 예감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디자인 발주 과정이 더욱 재밌고 특별하게 여겨집니다.
사족이지만 잠깐 제 이야기를 하면, 저는 처음에 편집자로 출판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2005년부터 2012년까지는 편집자로만 일했습니다. 그러다 2012년부터 북디자인 작업을 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편집자로 일하며 북디자인 작업을 겸하는 작업자들이 적잖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저도 그런 작업자 중 하나인 것이지요.
현재도 편집과 디자인 작업을 병행하고 있는데요,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조금은 특이한 포지션을 갖게 될 때가 있습니다. ‘중간 입장’이랄까요. 편집자 입장과 디자이너 입장의 중간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 듯해요. 어쩔 수 없이 말이죠. 이 ‘중간 입장’이 가장 두드러질 때가 제 경우에는 바로 디자인 발주 회의 때입니다. 회의에 임하는 제 입장이 어떤 때는 편집자, 어떤 때는 디자이너, 또 어떤 때는 편집자도 디자이너도 아닌 중간자(?)인 것만 같은 때가 있거든요.
이번 연재에서는 편집자와 디자이너와 (의도치 않았으나) 중간자 역할까지 두루 겪는 입장에서, 북디자인 발주를 할 때 알아두면 좋은 사항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디자이너 선정하기
저자에게 원고를 입고 받은 편집자는 원고를 검토하고 편집 회의를 엽니다. 부서장 및 편집부 구성원들과 함께하는 편집 회의를 통해 책 편집 방향을 보다 구체적으로 정하지요. 그런 다음 1차 교정을 보고, 1차 교정을 마칠 즈음 디자인 발주를 합니다. 디자인 발주 회의 전에 편집자는 이번 작업을 어느 디자이너에게 발주할지 궁리합니다. 디자이너 선정이라는 절차가 있는 것이지요. 디자이너 선정은 책의 물성을 완성하는 여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디자이너 선정 단계에서 유의할 점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디자이너 선정 시 고려 사항으로 다들 공감하실 만한 것으로는 일단 이런 것들이 있지요. 편안한 소통이 가능해야 하고 태도가 일방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점. 그런데 이런 건 협업자로서의 미덕에 속하는 것이자 보편적인 고려 사항이지요.
편집자가 디자이너를 선정할 때 가장 중요한 점으로 저는 이것을 꼽고 싶습니다. 섭외 전에 의뢰인 쪽에서 반드시 디자이너의 포트폴리오를 꼼꼼히 봐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닌가, 하시는 분들이 많을 듯한데 제 경험에 의하면 의외로 포트폴리오 검토를 생략하거나 간과하는 일이 많은 것 같아요. 반드시 검토해야 하는 건 표지뿐만 아니라 본문 레이아웃 디자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포트폴리오 검토의 중요성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디자이너마다 제각기 다른 작업적 특징과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접근법이 다르고 주된 표현 기법도 다르지요. 약점도 저마다 다릅니다. 물론 디자이너는 창작을 하는 미술작가가 아니고 산업의 구성원으로서 제품을 만드는 생산자이므로, 작업을 하면서 자신의 작가성만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디자이너는 작가처럼 자신의 고유한 방식과 표현을 늘 고민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도태되지요. 결국 디자이너는 고유한 것만 추구할 수 없지만 고유한 것을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가 좋다고 판단하는 것들을 계속 표현하고 구현해야만 하지요. 대중을 위한 제품을 만들면서도 자기다운 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궁리와 도전의 흔적이 디자이너의 포트폴리오에 남습니다.
이 흔적은 아주 미세한 부분에까지 새겨집니다. 본문 타입세팅 역시 디자이너가 고민한 결과죠. 레이아웃의 요소인 판형과 여백부터 글자 크기, 자간, 행간, 섞어쓰기 방식 등이 모두 디자이너가 오랜 고민 끝에 마련한 요소들입니다. 그래서 본문 타입세팅의 모습도 디자이너마다 차이를 보입니다. 좋다고 판단하는 결과가 디자이너마다 다르고, 책의 성격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까닭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의뢰인이 디자이너의 포트폴리오를 전혀 검토하지 않고 작업을 맡길 때 다음과 같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이를 테면, 평소 자간을 무척 넉넉하게 설정하는 디자이너에게 의뢰인이 별다른 근거도 없이 자간을 촘촘하게 좁혀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자간은 촘촘한 게 보기 좋다면서요. 의뢰인 입장에서는 이 정도는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여기지요. 하지만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무척 당황스러운 상황입니다. 이 간극이 이해가 되시나요?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표지에서든 본문에서든 일체의 장식 요소를 배제하는 디자이너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디자이너는 디자인에서 장식 요소는 완전히 배제하고, 대신 책의 주제에 대한 해석을 타이포로 시각화하는 데 전념합니다. 이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으로서 색상도 매우 절제해서 사용하지요. 그런데 이 디자이너를 작업자로 섭외한 후 ‘친근한 장식 요소를 최대한으로 넣고, 색상도 눈길을 확 끌도록 알록달록하고 화려하게’ 디자인해달라고 요구한다면 과연 마땅한 요구일까요. 마땅한 요구일 수 없지요. 결과물 역시 좋지 못할 테고요.
위와 같은 일들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 포트폴리오 검토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일은 매우 빈번하게 벌어집니다. 왜일까요. 포트폴리오 검토가 자주 생략되거나 덜 중요하게 취급되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의뢰인의 게으름이나 방심의 문제가 아니라 그보다 본질적인 차원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상당수의 의뢰인들이 디자이너를 ‘내가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대로 만들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본질적인 차원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의뢰인 입장에서 ‘나는 돈을 지불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내가 원하는 걸 요구할 거고 디자이너에게는 그걸 구현할 임무가 있지’라는 인식을 갖는 경우가 무척 많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의뢰인은 굳이 디자이너의 포트폴리오를 꼼꼼히 살펴보지 않습니다. 대신 그래픽 프로그램을 능숙하게 다루는지, 작업 단가가 저렴한지, 일정 내로 작업을 마칠 수 있는지를 우선으로 따지지요. 이 요건만 갖추면 자기가 시키는 일을 해내는 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의뢰인에게도 결과적으로 결코 득이 아니지요. 저런 인식을 가진 의뢰인과의 작업에서 디자이너가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걸 만들 수 있을 리 만무하고요. 결국은 수동적으로 뻔하고 식상한 것만 재생산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의뢰인은 디자이너의 포트폴리오를 꼼꼼히 보고, 디자이너의 특징과 작업관을 이해한 뒤에 섭외를 해야 합니다. 일단 덥썩 섭외한 다음 디자이너가 의뢰인 자신의 구미대로 책을 만들도록 요구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식이 아닙니다.
디자인 발주서에 적을 것들
그럼 의뢰인 입장에서는 의아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내 책’이 만들어지는 동안 나는 언제 어떻게 개입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아무리 의뢰인이라고 해도 작업하는 책이 온전히 ‘내 책’일 수 없다는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심지어 내가 글을 쓰고, 디자인하고, 제작 발주하고, 출고 관리하는 책이라고 해도 100퍼센트 ‘내 책’은 아닙니다. 굳이 따지면 여전히 인쇄사, 제본사, 지업사 등의 도움을 20퍼센트가량으로 책정해야 하고, 책을 판매하는 도매서점, 소매서점 등의 역할을 40퍼센트가량으로 책정해야 합니다. 유통사와 물류의 도움이 또한 필수이지요. 본인이 쓰고 만들고 알리는 일을 전부 도맡아 한다 해도 ‘책’을 탄생시키는 공정에서 40퍼센트만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완벽한 ‘내 책’을 만들기는 불가능하지요.
그럼 의뢰인은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각 담당자들에게 일을 맡긴 채 아무런 개입도 하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아닙니다. 이런 태도 역시 절대 안 될 일이지요. 의뢰인은 적극적으로 주요한 역할을 맡고 열심히 개입해야 합니다. 그런데 무작정 개입하기보다 효과적으로 개입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가장 주요하고 효과적인 개입은 디자인 발주서를 통한 개입입니다.
편집자(혹은 의뢰인)는 디자이너를 선정하고 작업 진행이 확정되면 디자인 발주서를 작성해 디자이너에게 전달합니다. 이 발주서 작성이 무척 중요합니다. 그런데 제가 중간자(?) 입장에서 봤을 때, 발주서 작성을 제대로 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편집자 입장에서는, 원고를 이제 막 한 차례 겨우 읽은 상태에서 발주서를 적다 보니, 원고 파악도 부족하고 시장에 대한 파악도 막연할 때가 많은 것이지요. 책의 구성도 아직 다듬어지기 전이고, 특히 디자인에서 역시 중요한 요소인 ‘제목’들의 정리가 안 된 상태입니다. 여러 모로 막연한 점이 많은 상태에서 디자인 발주서를 쓰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완성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출판사마다 다르긴 하지만 디자인 발주서의 기본 양식이 있지요. 상단에는 원고 제목을 적고, 다음으로 저역자명을 적습니다. 그다음엔 예상 판형과 예상 면수를 적고, 인쇄도수, 제본방식 등을 적습니다. 그 아래에는 출간 의의, 책 내용 소개 등을 적습니다. 말미에는 참고도서를 소개하고, 마지막으로는 디자이너에게 요청하는 내용을 적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디자인 발주서를 적는 타이밍이 원고 파악 이전일 때가 많다 보니 디자인 발주서의 모든 칸을 충실하게 채우는 것이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출간 의의나 책 내용 소개는 세세하고 장황하게 적는 반면 예상 판형이나 예상 면수 등은 그냥 빈칸으로 남기고 디자이너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출간 의의나 내용 소개는 도서 기획 당시 이미 작성한 바 있기에 복사해올 수 있습니다. 예상 판형이나 예상 면수는 아직 물성에 대한 감이 잡히기 전이다 보니 일단 빈칸으로 남겨놓고 대신 그 부분의 고민은 디자이너에게 맡기는 것이지요.
그런데 제 생각에, 의뢰인과 디자이너가 가장 치열하게 의논해야 하는 지점이 바로 판형과 면수, 인쇄 도수와 제본 방식입니다. 오히려 출간 의의나 내용 소개는 비워두어도 좋습니다. 디자이너가 직접 원고를 읽으면서 파악하면 되는 부분이니까요. 오히려 의뢰인이 자기 의견을 적극 피력할 부분은 판형이나 면수입니다. 의뢰인과 디자이너는 판형과 면수에 대한 의견을 세세히 교환하여 최종의 합의점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정해지면, 그다음으로는 디자이너가 구체적인 고민을 시작할 차례입니다. 원고 분량이 200자 원고지로 몇 매니까, 현재 판형에 흘렸을 때 쪽수가 이만큼 되도록 하려면, 글자 크기, 자간, 행간, 행장은 이렇게 하고, 여백은 이렇게 하고... 디자이너는 이처럼 확고한 틀 안에서 수월하게 자기가 갈고닦은 연장들을 꺼내며 고민을 시작할 겁니다.
다음 편에서는, 의뢰인이 디자이너에게 ‘내 취향’을 구현해주길 요구하면 안 되는 것인지, 디자이너의 디자인 시안이 맘에 안 들 땐 어떻게 하면 좋은지에 대해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최진규│충북 옥천의 소규모 출판사인 포도밭출판사에서 책 만드는 일을 한다. 북디자이너로도 일한다. 학교에서 편집과 디자인을 강의한다. 책방무사 멤버십이다. 어떤출판연구회 연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