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TFORM P 웹진의 ‘INTERVIEW’ 시리즈는 세 명의 인터뷰어(글지마, 정유민, 조현익)가 각각 소규모 출판사, 편집자, 북디자이너를 만나 각자의 작업에 대해 들어보는 연재입니다. 이번 인터뷰는 편집자 정유민이 만난 편집자 양선화의 이야기입니다.
아름다운 지옥에서 살아남은: 편집자 양선화
우리는 화가 많은 편집자였다. 우리는 소셜미디어라는 허공에 매일같이 욕을 퍼붓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알아봤으나 모른 척했다. 하지만 한 번 알아본 이상, 어떻게든 연은 닿을 수밖에 없었다. 각자의 사정 속에서 늘 화를 내던 두 편집자는 훗날 기획자와 필자로 만나 서로의 정체를 확인하고야 말았다. 편집자 양선화는 『출판, 노동, 목소리』 라는 책에 들어갈 목소리 중 하나를 써달라며 내게 원고청탁서를 내밀었다. 기획자와 필자라는 신분으로 잠시 옷을 갈아입은 우리는 그동안 ‘화’라는 형태로 쌓아왔던 ‘출판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책에 담았다.
동료로서 우리는 이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서로의 삶을, 노동을, 생각을 지켜보며 조용히 응원하고 공감하면서 편집자로서 각자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출판사라는 조직에서 산전수전 공중전을 모두 겪으면서도 지치지 않고 ‘팀플레이’를 해온 편집자 양선화를 지켜보며, 조직에 지쳐서 홀로서기를 해버린 프리랜서 편집자로서 궁금한 것들이 많아졌다. 이제 우리 터놓고 얘기해도 되지 않을까? 우리는 다시 만났다.
이제 꽤 오래전 이야기가 되었는데요, 보리 출판사 노조 탄압(?) 시절에 너무 힘들어 보여서 선화 씨가 이제 출판계를 떠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도 출판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일을 이어가는 걸 보며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보리에서 4년간 근무했어요. 저의 15년 출판 이력에서 가장 오래 일한 출판사였죠. 저를 무척 힘들게 했던 곳이지만 동시에 제가 정말 사랑했던 곳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버티며 싸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당시에는 증오의 마음도 컸고 상처도 많았어요. 그때의 경험이 트라우마처럼 남아서 이후의 회사 생활에도 영향을 줬고요. 지금은 마음을 많이 놓았어요. 애정이 너무 컸기 때문에 고통도 컸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제는 출판사라는 조직에 대한 이상이나 기대를 많이 내려놨어요.
어떤 점이 선화 씨를 가장 괴롭게 했던 걸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출판계에 만연한 ‘위선’일 거예요. 외부로 보이는 출판사의 지향점이나 철학과는 완전히 정반대되는 일들이 내부에서 벌어지니까요. 제가 보리 출판사를 좋아했던 건 보리가 지향하는 공동체 의식과 양질의 책들 때문이었는데 정작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존중받지 못하며 일하고 있다는 게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회사가 지향하는 바에 따르면 노조 설립은 아주 당연하고 정당한 일인데 막상 노조가 설립되자 갈등이 끊이지 않았거든요. 노조 분회장이었던 저도 유배당하듯이 부서 이동을 당했고 결국 자진 퇴사라는 결말을 맞았죠.
첫 회사에서부터 부당해고를 겪고 다음 회사에서는 노조 탄압을 경험하고 이후의 회사들에서도 조직에서 벌어지는 부당한 일들을 아주 다채롭게 겪으셨잖아요. 그럼에도 여전히 회사라는 조직에 몸담게 되는 동력은 무엇이었나요?
보리는 많은 걸 배운 곳이기도 해요. 비록 회사가 지향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일들이 일어났지만, 보리가 대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관은 저와 맞았다고 생각해요. ‘나무 한 그루의 가치에 걸맞은 책을 만들자’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단순히 선언으로 그치지 않고 정말 그런 책들을 만들어왔던 회사거든요. 지금도 정말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는 게 글쓰기 교육을 하는 선생님들이 아이들과 함께 투박하게 만든 책들, 글을 못 배운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워서 자기 삶을 써 내려간 책들이에요. 당사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그런 책들이 좋아요. 그때의 경험은 저의 커리어에 정말 큰 영향을 끼쳤어요. 끔찍한 경험을 했지만 결국 나를 만든 건 그 시절의 책들이구나. 그걸 인정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계속 편집자로 일하기를 선택한 것 같아요. 프리랜서 편집자의 길을 가지 않고 이직을 택했던 이유라면, ‘팀’을 좋아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팀원들이랑 함께 교류하고 협업하는 팀플레이가 좋아요. 그래서 조직이 주는 스트레스에서는 최대한 거리를 두면서 내가 누리고 싶은 팀플레이를 하자, 그렇게 기조를 정한 다음부터는 회사원으로서의 출판노동이 할 만해진 것 같아요.
선화 씨는 정말 ‘팀’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노조 활동도 그렇고 녹색당 활동도 했고 땡땡책협동조합도 만들었고 대표적인 팀스포츠인 풋살도 하고 있잖아요.
맞아요. 저는 사람에게 많은 상처를 받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에서 기쁨을 느껴요. 일종의 소속감, 어떤 집단의 일원이 되는 것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해요. 땡땡책협동조합 역시 사람이 모이기에 가능한 일들을 했어요. 출판유통, 독서문화 같은 출판 전반의 문화를 바꾸고 싶었거든요. 함께 모여서 교류하고 기여하고 나누는 과정에서 배우는 게 많아요. 우연한 기회에 시작하게 된 풋살을 이렇게 좋아하게 된 것도 이 운동이 결국 팀스포츠였기 때문인 것 같아요.
회사라는 게 어찌 보면 인생에서 가장 오랫동안 머무는 공간이잖아요. 그래서 쉽게 포기가 안 됐던 것 같아요. 저에게는 그런 조직이 너무나 중요했는데 부당한 일이 벌어지는 걸 참을 수가 없었고 그걸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조직이라는 게 결코 내 마음 같을 수가 없거든요. 동료들끼리도 생각이 다를 수 있고, 같은 방향을 향하는 듯 보이지만 정밀하게 들여다보면 또 각자의 사정이란 게 있어요. 예전에는 그런 걸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사람이 모이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상황들에 대해 어느 정도 단련이 된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헬북’이라는 이름으로 『미래가 물었다, 지금 잠깐 시간 되냐고』라는 인터뷰집을 만들었어요. 회사 다니는 편집자로서 독립출판을 병행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은데 어쩌다 ‘헬북’이 되셨나요?
이후에 옮겨간 어느 출판사에 다니고 있을 때였는데, 너무너무 힘들고 모멸감을 느끼는 날들이 이어지던 시절이었어요. 제가 노조를 하면서 사측과 숱하게 싸워봤고 박차고 나온 적도 있지만 그래도 책 만드는 게 싫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근데 이 회사에 있으면서는 책 만드는 일이 싫어질 정도로 너무 싫은 거예요. 다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 책 만드는 일인데 이게 싫어지면 어떡하지? 난 평생 이 일을 하면서 먹고살아야 하는데 이렇게 어떻게 버티지? 그런 생각을 하니까 당장 뭐라도 해야겠는 거예요.
저는 언젠가 독립을 해서 내가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어요. 그 ‘언젠가’가 도대체 언제 올지도 모르겠고 이러다간 내가 죽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날 밤에 휴대폰 메모장을 열어서 만나고 싶은 여성 출판인과 책방인들 목록을 썼어요. 이 사람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하고 책으로 만들어야지. 그 생각을 트위터에도 적었어요. 대대적으로 공표해버린 거죠. 그리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도 이 생각이 변함없다면 진행하는 거다! 그렇게 다음날부터 바로 섭외 메일을 보냈어요. 퇴근하고 인터뷰하고 주말마다 5시간씩 원고 쓰고 인터뷰하고 원고 쓰고… 진짜 힘들었고 무리한 스케줄이었는데 너무 재밌더라고요.
독립출판사 이름이자 필명이 ‘헬북’인데 지옥에서 온 편집자라고 했잖아요. 지옥 같은 회사에서 나온 편집자예요, 아님 지옥에서도 살아남은 편집자예요?
그렇게까지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듣고 보니 둘 다 맞는 것 같아요. 위선적인 게 저에게는 진짜 지옥이거든요. 지옥 같은 회사에서 탈출한 편집자이기도 하고, 지금까지 이어온 시간을 보면 생존자에 가깝기도 한 것 같거든요. 지옥에서 살아남았다는 자부심도 조금 있어요. 하지만 지옥 속에서도 아름다운 것들이 있었어요. 좋은 동료들이 너무나 많았고 좋은 책들이 많았고 책으로 인한 모든 것이 다 좋았거든요.
『미래가 물었다, 지금 잠깐 시간 되냐고』라는 제목이 정말 독특하다고 생각했어요.
인터뷰하면서 만난 여성 독립출판인과 책방인 들이 정말로 저의 미래거든요. 저는 아직 꿈만 꾸고 있는 현실인데 그걸 실현하며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선배’들을 만나보고 싶었어요. 자신만의 길을 일찍 개척해서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은 존경하고 동경해요. 이분들의 삶은 언젠가 내게 도래할지도 모르는, 내가 꿈꾸는 미래인데 이분들은 지금 실현해버린 거잖아요. 이 숨 막히는 나의 현재를 잠시 벗어나 미래의 삶들과 대화해보고 싶다. 그런 마음에서 책을 기획하고 제목을 지었죠.
코로나 때문에 언리미티드에디션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온라인으로만 열렸던 시기에 출품했는데 반응이 정말 좋았어요. 판매도 꽤 성공적이었고요. 하지만 독자들과 직접 만날 기회를 갖지 못한 게 많이 아쉬워서 출간한 지 3년이 지난 시점에 북토크를 기획해서 다시 만났어요.
‘편않’에서 출간된 『책에 대한 책에 대한 책』(이하 책.책.책)에도 필자로 참여하셨는데 어떻게 합류하게 되신 거예요?
처음엔 편집자 양선화가 아닌 ‘헬북’으로 원고 청탁이 들어왔어요. 『미래가 물었다, 지금 잠깐 시간 되냐고』를 인상 깊게 보셨다면서요. 근데 어쩐지 제 이름으로 글을 쓰고 싶었어요. 소박한 글이지만 제 이름으로 『책.책.책』에 책에 대한 글을 쓰고 그 이후에 너무 좋은 경험들을 했어요. 시작은 헬북이었는데 스스로 하고 싶은 기획을 하고 책을 만들었더니 이렇게 원고 청탁도 들어오고, 『책.책.책』에서 인연을 맺은 분과 일도 같이 하게 되고 출판편집 관련 강연도 들어왔어요. 지금 이렇게 플랫폼P 웹진 인터뷰도 하게 됐잖아요.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나니까 편집자로서 스스로를 더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은 혼자 묵묵히 편집 열심히 하면 되지 그랬는데, 조금이라도 활동이라는 걸 시작하니까 그게 꼬리를 물고 다양한 일들이 이어지더라고요. 문득 내가 좀 더 인지도를 쌓으면 편집자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많아지겠구나 싶었어요. 편집자로서 내가 일하고 싶은 작가랑 같이 일하는 게 정말 큰 행복이잖아요. 내가 스스로를 더 알리면 좋아하는 작가랑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지 않을까? 나와 책을 만들고 싶다며 먼저 제안해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꿈같은 상상을 했어요.
어떤 작가와 어떤 책을 만들고 싶으세요?
거창한 것은 아니에요. 당장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확실한 건, 저는 청소년 책을 좋아한다는 거예요. 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책 자체의 매력도 있지만 선생님들과 함께하는 작업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선생님들과는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어요. 똑같은 주제나 소재라도 청소년 독자 대상으로 책을 만드는 건 또 다르거든요. 예전 회사에서 생물 선생님과 작업한 『수상한 졸업여행』이라는 책이 있어요. 이분은 생물 선생님이면서 동시에 등단한 작가이기도 한데 주로 추리소설을 쓰셨어요. 그래서 과학, 추리, 모험, 학습 이런 요소들을 추리소설로 풀어내면 좋겠다 싶어서 제안을 드렸죠.
근데 사실 청소년 소설이니까 사람이 너무 쉽게 죽으면 안 되거든요. 선생님이 난감해하시더라고요. 사람 안 죽는 추리소설은 써본 적이 없다면서. 고민을 엄청 많이 하면서 쓰셨죠.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 무척 재미있었어요. 책도 잘 돼서 지금은 작품활동을 엄청 활발하게 하고 계세요.
선생님 저자는 대체로 위선이 없어요. 책 만들다 보면 ‘내가 작가다’ 하는 자부심이나 자존심이 너무 세서 편집자를 힘들게 하는 저자들도 많잖아요. 근데 선생님들은 일단 교육자라는 본업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어깨뽕’이 없어요. 협업하는 사람으로서 그건 정말 중요한 미덕이거든요. 저는 선생님들에게 늘 감동을 하며 일해요.
언젠가 독립을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혹시 계획하고 있는 책이 있을까요?
『미래가 물었다, 지금 잠깐 시간 되냐고』를 만들면서도 느꼈지만 저는 정말 인터뷰집을 만들고 싶어요. 회사에 소속되어서 기획하기에는 너무 마이너하긴 하죠.(웃음) 다들 인터뷰집은 안 팔린다고 하는데 저는 인터뷰를 통해 사람을 만나고 알아가고 거기서 배우는 게 정말 많거든요. 독립해서 책을 낸다면 내가 정말 잘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잖아요. 언젠가 정말 자유롭게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좋은 인터뷰집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이제 15년 차 편집자로서 팀장 역할도 하고 있는데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을 것 같아요.
사실 편집 업무에 대한 것보다는 힘든 게 몸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면 도망치라는 얘기를 꼭 해주고 싶어요. 몸이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건 정말 명확하거든요. 그건 버티면 안 돼요. 근데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가령 회사에서 어떤 사람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든지 부들부들 떨리고 잠이 안 온다, 그러면 당장 탈출해야 해요.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가 정신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건 분명 한계가 있어요.
내 몸이 신호를 보내면 일단 멈추고, 그곳을 벗어나고, 도움을 청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세상에 나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되고 고립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몰려오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분명 당신을 도와줄 사람이 있어요. 당장은 지금의 환경이 전부라고 생각하겠지만 한 발짝만 나서보면 다른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와 비슷한 연차의 동료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자신의 권력과 위치를 인지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과장급이나 팀장 정도의 중간관리자급이 되면 위에서 압박하고 밑에서 속 썩여서 내가 제일 힘들다고들 하는데, 그게 책임 회피의 명분이 되면 안 돼요. 나는 중간에 끼어서 권한도 없고 권력도 없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분명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책임져야 할 일이 있어요.
상사와 어울리기도 힘들고 후배들과 어울리는 것도 힘들어서 외롭다고 느낄 거예요. 근데 그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위치에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후배들이랑 친구가 될 필요도 없고 자신의 인간적인 외로움을 어필할 필요도 없어요. 외로워야 할 나이가 됐고 직급이 됐어요. 우리 그걸 인정합시다.
정유민
편집자. 좋아하는 것에 대해 글을 쓰고, 분야를 가리지 않고 책을 만들며, 책과 관련된 모든 것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