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IC]
2023년 PLATFORM P 웹진에서는 포도밭출판사의 최진규 대표가 소규모 출판의 과정을 살피고 안내합니다. 7편은 <뭐가 달라도 다른 마케팅을 위하여>입니다.
소규모출판사에서 마케팅에 대해 고민할 때 참고할 만한 내용을 써보려고 합니다. 저는 마케팅을 생각할 때면 자동 반사처럼 떠오르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십수 년 전 다니던 출판사의 주간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 말씀을 들은 자리는 월례 기획회의 자리. 편집자들이 저마다 작성해온 출간기획안을 차례대로 발표하고 있었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건, 발표자가 다르고 기획 아이템이 다름에도 어쩐 일인지 마케팅 계획에 나열한 사항들은 동일했습니다. 신문광고, 잡지광고, 온라인서점 타깃 메일링, 굿즈 제작, 서평단 운영, 인플루언서 책 증정, 언론사 북섹션 기자 미팅, 그리고 북토크 계획 등이 항상 동일하게 제시되었지요. 연달아 발표를 듣던 주간님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지는 듯했습니다. 한마디 하시겠구나 싶던 찰라,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지척에 앉아 있던 제가 들었습니다. “마케팅은 일단... 팔릴 책을 기획해야 하는데 말이야...”
마케팅 명제 하나. “팔릴 책을 기획하라”
당시에는 주간님 말씀을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너도 나도 전부 팔릴 책만 기획하다가는... 내가 사랑하는 ‘안 팔릴’ 책의 운명을 타고난 책들은 소멸하라는 말인가... 이런 마음이 있었지요. 물론 극단적으로 ‘팔릴 책’ 기획에만 몰두해서는 안 되고 그런 방향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시간이 지날수록 인정하게 되는 것은, 저 주간님의 말이 마케팅 명제에서 첫 번째로 삼을 만큼 중요한 말은 맞다는 것입니다. 최대의 마케팅은 팔릴 책을 기획하는 일입니다.
자, 그럼 이제 ‘팔릴 책’을 기획하는 방법을 진지하게 이야기해볼 차례... 그런데 벌써부터 조금 난감한 기분이 들지요. 팔릴 책을 기획하는 왕도라는 게 있다면, 그런 게 공공연하게 있다면, 세상 사람 모두가 출판일에 뛰어들어 큰돈을 벌어야 맞을 테니까요. 그럼 왕도는 없는 건가 하면... 왕도가 없진 않습니다. 선명한 왕도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팔리고 있는’ 아이템을 책으로 내는 것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장난치는 게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입니다. 팔리고 있는 아이템을 찾아 책으로 만들기. 이것이 팔릴 책을 기획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외서를 번역해서 내는 경우라면, 아마존 베스트셀러, 어디어디 매체 선정 올해의 책, 어느어느 명사의 강력 추천작 등의 타이틀을 가진 책을 내는 일이 기획의 왕도입니다. 그런 타이틀 중에도 소위 ‘급’이 있습니다. 권위 있는 수상 내용일수록, 대단한 판매 성적일수록 홍보의 효과는 더욱 좋겠지요. 이렇게 해외에서 이미 잘 팔리고 있는 화제작이라면 책에 대한 찬사도 넘쳐나는 상황일 테고, 그 찬사들을 모아 한국어판에서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판의 경우 더욱 화려한 띠지가 달리겠지요. 이처럼 팔리고 있는 해외 작품의 한국어판을 낸다면 마케팅 활동에도 당연히 날개가 달립니다.
국내 저자의 원고로 책을 내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미 많은 인기를 지니고 상당수의 독자를 확보한 저자의 원고로 책을 내는 일이 기획의 왕도입니다. 잘 팔리는 저자의 잘 팔리는 아이템으로 책을 낸다면, 그 책은 아주 높은 확률로 잘 팔리는 책이 됩니다. 그러니 너무 당연한 소리라서 허망할 정도이지만 팔리는 기획의 왕도가 있긴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딱 봐도 난관이 있지요. 잘 팔리는 아이템은 이미 계약부터 경쟁이 치열할 테니까요. 그 경쟁을 뚫어야 하는 난관이 존재합니다. 이를 뚫는 가장 유력한 방법은 물론 ‘돈’입니다. 이런 까닭에 잘 팔리는 책은 대부분 자본을 많이 가진 출판사가 독점하듯 가져갑니다. 한편 오직 돈만이 경쟁력의 전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따금 기획의 힘으로 이 난관이 뚫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문에 많은 출판사들이 이 국면에서 분투하고 있습니다. 저마다의 기획 역량을 통해 이 난관을 뚫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팔릴 책을 기획하라” 이 공식은 단순해 보이지만 곱씹을수록 지시하는 바가 많은 말이기도 합니다. 만약 당신이 ‘팔릴 책 저자’가 되고 싶다면, 당신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의 답 역시 저 공식으로 풀 수 있는지 모릅니다. 장차 ‘팔릴 책 저자’가 되고자 한다면? 일단 ‘팔리는 아이템’을 찾아서 써야 합니다.
하나마나한 소리를 성의 없이 쓰고 있다고 여기실까 봐 걱정이 되네요. 하지만 지금 강조하고 있는 점은 확실히 기획자와 창작자 들이 자주 잊거나 무시하는 지점입니다. 기획자나 창작자 상당수는 남이 읽고 싶어 하는 책보다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기획하고, 남이 써달라는 글보다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씁니다. 그것이 책으로 나왔을 때 잘 팔릴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은 언제나 최대의 불확실성 속에 있기 마련이고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 차원이 됩니다. 반면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하는 걸 고민해서 쓰고, 사람들이 사고 싶어 하는 매력을 고민해 책으로 만들면, 책이 잘 팔릴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은 불확실성의 늪에서 상당 부분 구제됩니다. ‘팔릴 책’에 가까워지는 것이지요. 물론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하는 걸 알아내는 일과 사람들을 매혹하는 지점을 아는 일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 일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에, 출판사의 기획회의 시간은 항상 그토록 괴로울 만큼 길게 이어지는 듯합니다. 어쨌든 저 답을 찾은 저자(와 그 출판사)는 ‘팔리는 책’을 만들게 됩니다.
마케팅 명제 둘. “계획대로 착착착”
팔릴 책을 기획하는 것이 최대의 마케팅이 될 수 있다는 얘기를 앞에서 했습니다. 그런데 마케팅은 기획이면서 한편 계획이기도 합니다. 기획과 계획을 엄밀히 구분하는 일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무용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둘은 하나처럼 돼야 하지요. 하지만 조금 구별해서 파악할 필요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계획’만 놓고 말해보려 합니다.
우리가 주의할 점이, 잘 팔리는 저자의 잘 팔리는 아이템을 책으로 냈다고 책이 무조건 성공하지는 않습니다. 저 길이 성공하는 왕도이긴 하지만, 이 성공에는 하나의 단서가 붙죠. 투자 이상으로 성공해야 진정한 성공이 된다는 단서. 그래서 단기간에 책이 잘 팔리더라고 최종적으로는 성공이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이런 경우도 있지요. 번뜩이는 홍보 문구나 기가 막힌 홍보 타이밍 등의 이유로 책 판매가 급증하는 경우. 하지만 이런 효과도 일시적일 수 있습니다. 결국 힘차게 쭉쭉 성공 궤도에 오르기 위해서는 날개가 필요합니다. 그 날개가 되는 활동이 바로 ‘계획 수행’입니다.
대개 빵 터지는 기획이 훨훨 날기 위한 조건이며 성공을 위한 ‘날개’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계획 수행이 더 중요한 날개입니다. 즉 마케팅에서 상당히 중요한 영역은 홍보 작업을 적시에 성실하게 착착착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규모출판의 경우 홍보 작업을 계획대로 진행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기획, 편집, 디자인, 마케팅 등의 업무를 부서를 나눠 분담하는 대형 출판사라면, 맡은 바 활동을 적시에 해내는 일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어렵지 않다기보다는 당연하게 해야 하는 일로서 여겨지겠지요. 하지만 소규모출판사의 경우, 한두 사람이 저 모든 일을 도맡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적시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활동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늘 업무가 과다한 상황인데다, 업무마다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모드 전환이 필요한데 한 사람이 여러 일을 두루 할 때는 모드 전환이 힘든 경우가 무척 많은 탓입니다. 그러다 보면 활동 타이밍이 조금씩 미뤄지는 일이 생기지요. 판권상 발행일이 지났는데도 보도자료 준비가 안 되어서 언론사 릴리스를 제때 못한다든가, 이벤트 개시 시점이 늦어 신간노출 기간의 시너지 효과를 보지 못한다든가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에 대해서는 뭔가 왕도가 있는 것처럼 말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그저 ‘나는 기계다...’ 라고 생각하면서 정해진 타임라인에 맞춰 딸그락딸그락 움직이는 것이 최선인 것 같습니다. 계획을 따른다는 것이 조금은 그런 일이지 않은가요. 기획에서 이미 영혼을 다 갈아 넣었기 때문에, 계획에서는 갈아 넣을 영혼마저 남아있지 않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니 어차피 영혼이 빠져나간 몸뚱이... 나는 기계다 하면서 털거덕털거덕 움직이는 거지요. 이때 우리는 대부분 그만두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아니 내가 이렇게 영혼 없이 일하려고 이 일을 시작한 게 아닌데... 하면서 뭔가 사태를 재고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재고하고 자시고 하다가는 타이밍이 지나가버린다는 것이 제 경험입니다. 그저 할일을 꾸역꾸역 하는 게 낫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소규모출판에서 마케팅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은 대략 정해져 있습니다. 보도자료 릴리스, 관련 인사들에게 책 증정, 서점 론칭, 서점원 및 관심 인사 개별 접촉, 서평을 받기 위한 대외 활동, 독자 모임 기획, 북토크 및 저자와의 만남 행사, SNS 홍보, 굿즈 제작, 서점 이벤트... 대부분 이 범주 안에서 마케팅 활동이 이뤄집니다. 각 세부 진행 기획을 해당 책에 맞게, 그리고 출판사 개성에 맞게 조정하며 진행하는 것이 주어진 과제인 셈이지요. 책을 내놓고서 이 일들을 착착착 적시에 수행하는 것이 마케팅 ‘계획’의 수행입니다. 소규모 출판을 한다면 이때 특히 영혼이 털려서 다 관두고 싶어지는데요... (심지어 독자 반응도, 시장 반응도 없다면 정말 관두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그러지 말고 나는 기계다 여기고 끝까지 해내는 것이 계획 수행의 왕도라면 왕도입니다.
마케팅 명제 셋. “원점으로 돌아가...”
불쑥 오래 전 디자인 선생님에게 들었던 말이 떠오르네요. 이 얘기는 제가 앞선 연재에서도 적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선생님 왈. 책 디자인을 할 때 파격적인 걸 하려고 맘먹지 말라고 했지요. 파격은 격을 완성한 후 그걸 부술 때가 파격이지, 맨땅에서부터 파격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면서. 그 말씀은 특히나 자꾸 맨땅에서 뭘 하려고 하던 제게 큰 가르침이 되어주었죠...
하지만 파격을 꿈꾸는 일은 즐겁습니다. 그리고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정해진 방법으로만 일하고, 모두가 왕도만을 찾는다면, 그곳은 빠른 속도로 플랜테이션 농장처럼 변합니다. 플랜테이션 농업은 특정 작물만 대량 생산하는 집약 농법이지요. 그러기 위해 많은 강제와 통제와 억지를 투여합니다. 그것은 분류하고 위계화하고 배제하고 처분하죠. 무엇을? 성공의 요인과 실패의 요인을 분류하고, 성공을 무조건 우세한 것으로 평가하며, 실패를 배제하고, 실패 요인이 될 수 있는 모든 잠재적인 요소를 처분합니다. 대량화, 집약화의 본성이 그렇습니다. 플랜테이션 농장은 말끔하고 번듯해 보여도 사실 살벌한 곳일 수밖에 없습니다. 수익을 위해 키우는 특정 작물 말고 다른 모든 생명을 폐기물로 취급하는 곳이니까요.
재밌는 것은 소규모 출판사를 운영하다 보면 의도하지 않아도 어느 순간 갈림길에 이르게 됩니다. 그 갈림길을 아주 거칠게 표현하자면, 근근이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더 많은 축적이 일어나도록 회사를 확장할 것인가의 갈림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갈림길 국면에는 여러 갈등 지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출판사의 정체성 고민과도 연결됩니다. 정체성 고민이라니, 정말 뜻하지 않은 일이지요. 눈앞에 닥친 일만 하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정체성 고민이라니... 정체성 고민이 뭐냐면 이런 겁니다. 계속 소규모 출판사로서 근근이 회사를 운영하다가는 미래가 없을 것 같은데 라는 불안이 한편에 있고요. 그렇다고 사세를 확장하자니 위험 부담이 있는데다가 플랜테이션 농장처럼 변질될까 싶은 두려움이 한편에 있습니다. 이 불안과 두려움 사이에 갇혀서 아무도 시키지 않은 고민을 혼자서 막 해야만 합니다. 여름날 모기장에 갇힌 날벌레처럼 발버둥 치면서 고민의 출구를 찾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소규모 출판이 사명으로 여기고 해야만 하는 고민이 또 이런 것들인 것 같습니다. 즉 위에 말한 왕도니 비법이니 정해진 계획이니 하는 것들을 다 와르르 무너뜨려본 다음에, 남들이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찾는 실험을 해봐야만 합니다.
여기서 사명이란 ‘맡겨진 임무’라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저런 파격 실험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소규모 출판에게 맡겨진 임무라는 것인지를 정확히 밝힐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어떤 대의나 지극한 목표보다는 소규모 출판의 ‘생존’을 위해 파격 실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뭐라도 해본다’고 말할 때, 그 말에는 자조의 뉘앙스가 스며들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뭐라도 해본다’는 정신이 정말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뭐가 달라도 다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자본이 많은 출판사는 계속 자본 축적 위주로 살길을 찾을 것입니다. 그 길을 똑같이 따르면 소규모 출판은 언제나 약화할 뿐입니다. 그 길에도 한 발은 걸치되 자구의 길을 계속 찾아야 합니다. 그 방법을 계속 찾는 것. 그 임무 수행 역시 소규모 출판의 생존에 필수 조건인 것 같습니다.
다음 편은 연재의 8화로서 마지막 편입니다.
최진규│충북 옥천의 소규모 출판사인 포도밭출판사에서 책 만드는 일을 한다. 북디자이너로도 일한다. 학교에서 편집과 디자인을 강의한다. 책방무사 멤버십이다. 어떤출판연구회 연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