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TFORM P 웹진의 ‘INTERVIEW’ 시리즈는 세 명의 인터뷰어(글지마, 정유민, 조현익)가 각각 소규모 출판사, 편집자, 북디자이너를 만나 각자의 작업에 대해 들어보는 연재입니다. 이번 인터뷰는 조현익 스튜디오 하프-보틀 대표가 만난 함지은 열린책들 디자인팀장 이야기입니다.
가지고 싶은 책을 상상하고 제작하기: 함지은이 말하는 책자 디자인
이번 인터뷰 주인공은 독특하게도 “하나의 뚜렷한 스타일이 없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스스로 말한다. 하지만 그의 작업물은 언제나 독자에게 특별한 감각을 불러일으켜서 디자이너가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일관된 스타일을 가진 디자이너’만이 좋은 디자이너인 것은 아니다. 그는 어쩌면 ‘책’ 그 자체의 속성을 유연하게 활용할 방법을 잘 알 것이다. 함지은 디자이너의 이야기는 출판을 처음 준비하는 이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함지은 저는 출판사 “열린책들”의 디자인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함지은입니다. 열린책들은 1986년에 설립됐어요. 러시아 문학을 중심으로 시작한 출판사인데, 문학을 비롯해서 인문서, 예술서까지 두루 소개하고 있는 출판사입니다.
조현익 선생님의 과거 인터뷰에서 대학교 시절 회화를 전공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회화에서 시작해서 북디자인을 처음으로 경험하고 북디자인에 정착한 과정이 궁금합니다.
함지은 식상한 답이지만, 책을 좋아했어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해서 자연스레 책을 만들게 된 것 같아요. 학교에서는 회화와 디자인이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표지 디자인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둘이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져요. 그것이 열린책들의 기조이기도 하고요.
실제 과정으로 말씀드리면, 저는 SBI(한국출판인회의 서울북인스티튜트)의 채용예정자 과정을 통해서 대학교에서보다 좀더 실무에 가까운 내용을 배우고, 북디자인 에이전시에서 경력을 쌓은 뒤 열린책들로 이직했고, 지금까지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방식
조현익 같은 출판사에서 일하는 편집자, 작가, 제작팀 등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작업을 진행하게 될텐데요. 출판사 내부에서 디자이너들이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이 궁금합니다.
함지은 기획자이자 편집자로 구성된 기획편집팀에서 도서를 기획하면, 매주 진행되는 마케팅 회의에서 디자이너, 편집자, 마케팅팀, 홍보팀 등이 모여서 출간할 도서들의 기획 방향을 먼저 이야기해요. 여기에서 디자이너는 작업할 책의 내용과 성격을 파악하고, 이때 디자인 컨셉과 방향을 논의하기도 합니다.
논의가 끝나면 본문 디자인부터 시작합니다. 어떤 출판사에서는 본문과 표지 디자인, 광고 작업을 별도의 부서에서 맡기도 하지만, 열린책들에서는 디자이너 한 명이 한 프로젝트의 본문, 표지 디자인과 광고, 홍보에 필요한 후속 작업을 모두 맡아서 진행해요. 이렇게 하면 프로젝트의 시각적 목소리를 하나로 통일하여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것 같아요.
본문 디자인이 확정되면 조판을 하고, 교정 사항을 반영하는 정판을 해요. 1교, 2교, 3교, OK❶교의 과정에서 본문 디자인이 디벨롭되고요. 표지 디자인도 같이 진행해요. 표지와 제작 사양이 결정되면 제작 부서와 함께 샘플을 제작하거나 인쇄 감리를 진행하고. 그 후에 마케팅팀, 홍보팀과 온·오프라인 서점 광고, SNS 홍보 관련 등의 협업이 이뤄지는데 이때 필요한 시각적인 부분을 디자이너가 담당합니다.
조현익 한 명의 디자이너가 기획부터 홍보까지, 책 한 권이 만들어지는 과정 전체에 관여하는데요. 이 협업 과정에서 특별히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 철학은 무엇일까요?
함지은 책을 아름답게, 가지고 싶게 만드는 게 첫 번째인 것 같고, 멋있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서 디자인이나 제작 단계에서 집요하게 완성도를 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 외에는, 소통이 전부인 것 같아요. 말씀드렸듯 여러 부서들이 협업하기 때문에 내가 맡은 몫을 일정에 맞춰 정확하게 처리해야 해요. 그러면서도 집요함을 가지고 멋있는 결과물을 내는 것. 그 밸런스를 잘 유지하려고 신경쓰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조현익 출판을 처음 시도하는 분들이 궁금해하는 것이 ‘디자이너와 소통하는 과정’ 그리고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어떻게 소통하는 것이 가장 좋은가?’ 였어요. 선생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점이 무엇일까요?
함지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뤄지는 일이니까 서로 배려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정말 사소하게는 파일 정리나 형식, 전달하는 방식까지도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먼저 고민하는 것이 디자이너에게 중요한 부분인 것 같고요. 그냥 인간관계라고 생각하면 그 안에서 서로 맞춰가며 일을 진행할 수 있으니까,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❶편집자가 원고를 교정·교열하는 작업을 보통 3회 진행하는데, 순서대로 1교, 2교, 3교라고 한다. “OK교”는 3교까지 반영한 판면을 최종 확인하는 작업을 뜻한다.
수십 년 쌓아올려진 유산을 마주하기
조현익 열린책들이 워낙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발행하는 책에 대한 철학이 분명하다보니, 그간 쌓인 열린책들의 작업물이 디자이너에게는 각별한 의미로 다가올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잘 계승하여 발전시킬 대상’이라던가 ‘극복할 대상’이라던가.
함지은 열린책들 출판사가 37년 동안 쌓아온 역사가 있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들과 다양한 아름다운 디자인들이 만나서 쌓인 그 수많은 결과물이 저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그래서 여기에서 일하는 게 정말 재밌고 좋은 것 같아요. 그런 역사가 가진 힘이 정말 크다고 생각해서 이걸 잘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러면서도 새로운 것들을 끊임없이 제안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책임감도 느끼게 돼요.
조현익 그게 맞는 말씀인 것 같아요. 매 작업마다 두 가지 속성 사이에서 순간순간 결정하기 어려우니까.
함지은 사실 상황마다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저의 결정이라기보다는, 회사 차원에서 ‘이런 것을 바꿔보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논의도 계속되고 있어요. 예전에는 두꺼운 책이 많이 나왔지만 지금은 긴 호흡을 어려워하시는 독자들이 많다면 ‘분권을 다르게 해볼까? 행수나 행간을 좀더 읽기 쉽도록 바꿔볼까?’ 이런 논의를 하기도 하고요. 기존의 좋은 점은 계승하면서도 지금의 독자들에게 맞춰가려는 노력과 고민을 계속 하고 있죠.
조현익 선생님이 많이 하셨던 작업 중에서도 그런 고민을 많이 하게 될 작업들이, 과거에 열린책들에서 나왔던 책을 재발행하는 작업이지요.
함지은 “리커버(re-cover)”라고 보통 부르는데요, 오늘 보여드릴 책도 다 리커버 작업이네요. 출판사의 인하우스 디자이너가 해볼 수 있는, 누릴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가 리커버 프로젝트인 것 같아요. 내용도 그렇고, 디자인 면에서도 그동안 많은 사랑을 받아 온 책인데, 그걸 현재의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은 도전적이기도 하고 새롭기도 하고, 항상 재밌는 것 같아요. 책을 보면서 이야기해볼까요?
유산을 새롭게 마주하는 디자인 작업
1. 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
함지은 열린책들의 창립 35주년을 기념하며 과거에 펴냈던 세계문학 중단편을 모아서 세트로 만든 것인데요. 저 개인적으로는 어떤 전환점이 되기도 한 작업이에요. 저는 “매 책마다 다른 사람이 한 것처럼 디자인하는,” 스타일이 없는 디자이너이길 바라는 편인데, 이때 그런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거든요. 기획 단계부터 ‘가볍고 심플한 것’을 강조했어요. 판형도 한 손에 들어갈 수 있게 하고, 종이도 가볍게 쓰고, 두께도 얇게 만들었는데, 그런 기획 때문에 디자인도 이렇게 간결한 방향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박스에 넣은 채로 래핑을 해서 포장한 상태[하나의 세트]로만 판매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권 한 권이 각각 매대에 놓이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어요. 모두 유명한 작가의 유명한 작품들이기도 해서, 앞표지에 한글로 표기해야 하는 제목이나 저자, 역자 같은 서지정보를 모두 빼는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있었어요. 작가의 이름은 모국어(영문, 러시아어, 한자 등)로 쓰고, 작품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간결한 그래픽 이미지를 하나씩 넣었어요.
조현익 이 이미지가 각 작품의 제목으로 연결되는 것이군요.
함지은 『이방인』(알베르 카뮈)의 날카로운 햇빛이나 『동물 농장』(조지 오웰)의 꼬리만 보이는 돼지처럼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바로 알아채기 쉬운 것도 있고요. 서로 다른 해석이 분분할 만한 것도 있어요. 『6호 병동』(안톤 체호프)의 줄무늬는 환자들의 환자복 무늬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을 가두는 회색 울타리로도 보였으면 했어요. 또 프란츠 카프카가 『변신』의 원고를 출판사에 보낼 때 표지에 어떤 벌레 그림도 나오지 않도록 요구했다는 것에서 착안하여 표지에 벌레 대신 벌레가 지나간 듯한 자국만 남기기도 했고요. 이렇게 간결한 그래픽으로 각각의 작품 내용을 담을 수 있도록 표지를 구성했다고 봐주시면 될 것 같아요.
또 강렬한 컬러 조합이 이 세트의 포인트인데요. 『어린 왕자』(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나 『동물 농장』 처럼 정오에 읽을 만한 가볍고 밝은 소설을 하나로 묶은 눈(noon) 세트, 『이방인』이나 『인간 실격』(다자이 오사무)처럼 무게감 있고 진중한 이야기들을 묶은 미드나잇(midnight) 세트로 큐레이션 했습니다. 컬러도 각 세트의 성격에 맞춰 구성했어요. 전체적인 분위기를 봤을 때 미드나잇 세트는 무게감이 있는 편이고, 눈 세트는 상대적으로 발랄한 느낌이 있어요.
조현익 박스 안에 넣어서 포장하는 것도 기획할 때부터 의견이 나온 건가요?
함지은 맞아요. 기획 단계부터 박스 포장과 큐레이션 등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었고, 여러 팀 간의 논의를 거쳐 점점 발전한 거죠. 디자이너는 이 과정에서 시각적인 부분을 담당했어요.
뒷표지도 특별한데, 각 작품의 가장 중요한 문장 하나만 심플하게, 크게 넣었어요. 보통 뒷표지는 메인 카피, 서브 카피, 추천의 말, 서평이 가득한 광고의 장이지만, 이 책은 매대에 놓이지 않는 상황이어서 과감하게 확 비울 수 있었어요. 예를 들어 『노인과 바다』(어니스트 헤밍웨이)에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 문장(“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 거야”)을 읽을 때 확 와닿는 게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디자이너가 편집부에 “뒤표지 내용을 이렇게 하자”고 의견을 드리는 경우는 없는데, 이때는 전반적으로 강렬하고 심플한 컨셉을 명확하게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뒤표지에 작품을 관통하는 한 문장만을 넣으면 어떨지 제안 드렸고, 앞날개도 일반적인 도서보다 폭을 아주 짧게 잡아서 작가의 정말 중요한 정보만 넣으면 좋겠다고, 디자이너가 이런 제안을 역으로 드린 특이한 사례입니다.
함지은 “디 에센셜”은 교보문고가 여러 출판사와의 협업으로 펴내는 시리즈인데, 작가의 핵심 작품을 한 권에 담는 기획입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앞쪽에 실려 있고, 뒤쪽에는 작가가 직접 쓴 작가 노트가 있어요. 단 한 권으로 작품과 작가 노트를 모두 읽고 작품을 확실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콘셉트의 도서입니다.
리커버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판매를 기대할 수 있던 시절이 잠깐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책이 나온 작년(2022년) 말에는 리커버 프로젝트에서도 새로운 것을 제안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어요. 그래서 추가했던 요소가, 옛날 종이사전과 성경에서 볼 수 있던 “반달 색인”, 인덱스(Index)라고도 하는 것이에요.
책의 배면을 파내고 스티커도 부착하는, 고전적인 방식이잖아요. 요즘은 잘 안 쓰이는 방법이고, 공정에서도 제본까지 한 다음 구멍을 파내고 스티커를 따로 제작해서 붙이는, 이런 과정은 번거롭다면 번거롭고 또 비용과 시간이 더 많이 들죠. 하지만 이 부분을 독자분들이 너무 재밌어 하시고 이 책의 매력 요소라고 평가해주셨어요. 책의 소장성과 특별한 매력을 더하는 데 주력했던 디자인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조현익 반달 색인을 어떤 모양으로 얼마나 파내야 하는지 주문하고, 실제로 잘 파였는지 계속 확인하고, 그 때마다 제작자와 계속 대화를 나누고. 그런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이런 후가공을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요.
함지은 맞아요. 자주 진행하는 공정이 아니다 보니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는데, 제작 부서에서 최대한 의도에 맞게 구현되도록 많은 노력을 하셨어요. 업체와 소통하며 “위치는 여기로 해 주세요, 이렇게 붙여 주세요” 요청하는 등 디자이너와 함께 세심하게 신경을 많이 썼기에 좋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함지은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의 한국어판 출간 30주년을 기념하는 이 세트도, 박스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책 박스에 이렇게 ‘뜯는’ 부분을 만들었어요. 박스 세트는 보통 책을 박스 안에 꽂아넣는 형태로 만드는데, 이것은 이렇게 뜯어야만 상단을 열 수 있도록 했고, 8권의 책이 들어가 있어요.
조현익 이 ‘뜯는’ 것을 표현하는 용어가 있을까요?
함지은 우리가 자주 접하는 박카스 박스나 커피 믹스 박스 같은 형태잖아요. 제작 업체에서 “지네발”, 지네의 발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이걸 뜯으면 작가님의 데뷔작 『개미』의 첫 문장이 드러나게 했어요. 『개미』는 지금의 베르베르 작가님이 있기까지 아주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고, 이 세트를 구입하는 분들은 『개미』를 재미있게 읽으셨을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독자분들이 이 작품을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과 즐거움을 한 번 더 느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아이디어를 냈어요.
이게 책에 많이 쓰이는 패키징 형태는 아니어서 어려움도 있었어요. 8권의 책을 한 번에 넣으면 얇은 소재로 만든 박스는 무너져버려요. 그런데 박스가 너무 두꺼우면 지네발 부분을 뜯기가 어려워지고. 그래서 튼튼하면서 쉽게 뜯을 수 있도록, 박스 샘플 작업을 여러 번 거쳐서 만들었어요.
그리고 표지 그래픽을 보시면 작은 점들이 불규칙하게 모여서 하나의 그래픽을 이루고 있는데, 이걸 효과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 실버와 네온 컬러의 별색을 조합해서 인쇄했습니다.
조현익 저는 이걸 처음 봤을 때, 표지 그래픽 속 도트(점들)를 이미지로 만들어서 인쇄한 게 아니라, 박이나 판화로 직접 찍어낸 도트인 줄 알았어요.
함지은 아니요, 인쇄 수량이 많다보니 그럴 수는 없어요. 하지만 점들을 그래픽 작업으로 잘 매만지고, 실버와 네온 별색으로 인쇄하면 이런 느낌이 나더라고요. SF적 요소가 많은 작가님이라서 이런 컬러가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책 ‘제품 디자인’과 제작
조현익 지금까지 소개해주신 작업들이 — 리커버 디자인 작업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 마치 제품 디자인처럼 접근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패키징을 어떻게 보여주고, 사람들이 책을 발견하고 잡을 때 어떤 감정이 들게 할 것인가, 어떤 느낌으로 경험하도록 할 것인가. 책을 기획하시는 분들 입장에서는 책 디자인에 대해 이렇게 접근하는 사례가 흔치 않아서, 신기했습니다.
함지은 책의 역사가 정말 오래됐잖아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했고, 어떤 정보를 얻으려면 책을 읽었어야 하는 시대가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시대고, 그래서 책의 ‘소장성’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책에서 정보를 얻는다는 기능을 넘어서서, 어떤 오브제처럼 기능하거나 자랑하고 싶은 물건이 된다던가. 책이 그런 도구로도 확장되고 있어서 이런 시도들이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조현익 디자이너가 표지 또는 패키지 디자인을 기획자에게 전달할 때 ‘이 디자인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라던가 ‘제작 과정이 너무 복잡해질 것 같다’는 피드백을 많이 듣는데요. 그 때부터는 디자이너가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부분과 기획자가 원하는 부분을 맞춰나가는 과정이 되게 중요하잖아요.
함지은 그 과정이 작업의 전부인 것 같아요. 그런데 저희 회사 특성일 수도 있는데,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는 목표를 갖고 디자이너로서 지금까지 시도해보지 않은 디자인이나 제작 사양 등을 제안해야 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물론 책 제작에 있어 비용과 시간 등이 중요하니까 이런 부분에 문제가 있다면 끊임없이 고민하고 더 좋은 해결책을 제안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앞서 보여드린 〈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의 경우, 선명한 결과물을 얻기 위해 표지마다 별색을 사용했지만, 무한히 많은 별색을 쓸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별색을 사용하더라도 나머지 부분은 4도나 2도, 1도로도 인쇄할 수 있게 하고. 또 서로 다른 2개의 표지를 한 판에 얹어서 같이 인쇄하도록 두 표지의 색을 같은 것으로 쓴다거나. 비용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그런 것을 계산하고 여러 부서와 협의했습니다.
조현익 책을 읽는 독자들은 앞에서 ‘해결책’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떠올리기 어려운 법인데, 책 제작 이면의 과정에 대해 많이들 알아주면 좋겠어요.
함지은 하지만 그 과정을 독자들이 느끼실 수 없도록 만드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제작 비용과 시간 문제도 잘 해결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결과물이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현익 독자들이 과정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잘 만드는 것이 제일 좋은 솔루션이겠네요.
큰 출판사가 할 수 있는 것, 소규모 독립출판이 할 수 있는 것
조현익 그렇다면 큰 출판사에서 도전할 수 있는 사례와는 또다른, 소규모 독립출판을 준비하는 분들이 (책 디자인과 관련해서) 도전하고 시도할 수 있는 것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인터뷰의 독자분들께 드릴 말씀도 이 질문을 통해 자연스럽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함지은 제가 오늘 작업물을 보여드리면서 이런저런 후가공과 인쇄 방식도 함께 보여드렸는데, 제작 수량이 많기 때문에 합리적인 제작 단가 안에서 특별히 시도할 수 있는 것도 있는 듯해요. 책을 많이 만들어야 개당 단가가 저렴해지고, 소량으로 만들면 너무 비싸거나 아예 제작이 불가능한 것도 많으니까요. 이게 큰 출판사의 디자이너여서 시도할 수 있는 부분인 것 같고요.
소규모 독립출판은 제품으로서의 책을 만드는 게 아니라,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는 관점이 열려있어서 좋다고 생각해요. 보통 ‘나의 이야기’나 ‘내가 진짜 잘 아는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게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제일 큰 매력인 것 같고 그 매력을 잘 살리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조현익 대량 생산을 해야 가능한 후가공과 디자인도 있지만, 반대로 생산량이 적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시도들도 있겠구요.
함지은 예를 들어서 실크 스크린 인쇄처럼 손으로 하는 작업이라면, 대량으로 하려면 너무 힘들고 단가도 오히려 올라갈 거에요. 이처럼 수작업이 필요한 방식이 소규모 출판에서 재미있는 시도를 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일 수 있겠네요.
그러면 상대적으로 큰 출판사의 책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경험을 독자들에게 제공할 수도 있고, 좀더 과감한 디자인을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에선 작품을 대표할 만한 이미지를 앞표지에 넣었는데, 그게 아니라 책등에 넣을 수도, 아니면 아예 없앤 채로 만들 수도 있잖아요. ‘나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더 과감한 디자인을 더 많이 제안하면 독자분들도 많이 사랑해주시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 다양한 디자인을 많이 보여주시면 좋겠습니다.
조현익
그래픽 디자이너이면서 작가와 출판인 역할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 관점, 상상, 가치관을 시각화하여, 인상적인 사고와 감각을 전달하는 문화를 만듭니다. 포스터와 책자 편집디자인, 웹디자인, 저널리즘 컨텐츠 디자인, 로고와 굿즈를 비롯한 비주얼 아이덴티티에 관심이 많습니다.